■태평로

"주권은 개인에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사상가나 정치인들이 금언처럼 하는 말이다. 원어로는 "Sovereignty rests with individuals", "Sovereignty resides in the person" 정도로 표현한다. 이는 미국 보수 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다. 주권 주체를 국민 또는 인민으로 번역되는 'the people' 대신 개인을 뜻하는 'the person'으로 한 게 핵심이다. 국가, 민족, 집단 등이 아닌 각 개인에 주권이 있다는 것을 민주주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적어도 미국 안에선 민주당과 리버럴리스트도 이 부분에 대한 원칙적 공감이 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 의지를 우선하는 이런 시각은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이자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 주요 동인 중 하나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청교도 전통에 기반한 미국 보수주의는 이처럼 팍스 아메리카나의 부상에 기여했다.

▶자유에 무게를 둔 미국의 보수

미국 보수 정치가 개인의 주권을 지고선으로 삼은 것은 자유에 무게를 두어서다. 우리가 인지 못 할 뿐 인류사 전체에서 개인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는 찰나에 가깝다. 미국 건국을 낳은 시민혁명도 개인 주권과 자유를 목숨처럼 여기는 가치관에서 비롯됐다. 미국 주요 선거에서 총기 소지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2조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이런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보수가 총기 소지에 찬성하는 것은 정부 등 권력 집단이 개인을 억압·수탈할 때 개인 주권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맞설 근거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비슷한 시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이 주권 주체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한 것은 양국의 가치관 차이를 드러낸다. 프랑스 혁명은 미화된 측면이 있지만 결과는 공포 정치 속 50만 시민의 처형과 학살, 황제정으로의 퇴보였고, 훗날 유라시아를 휩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근대 英·佛 개혁, 보수 정치의 성과

근현대사에서 기억되는 굵직한 개혁 조치도 보수 정치의 성과였다. 프랑스 혁명에서 목도한 공포와 야만은 보수 진영에 경계감을 줬는데, 영미 보수 정치의 아버지 격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를 체계화해 보수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속 폭력과 파괴에 반대해 중용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개혁하는 것을 보수주의로 규정했다. 버크식 보수 정치의 기틀은 19세기 영국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현실화한다. 비스마르크는 건강보험, 노령 연금, 산재 보상금 등을 도입해 지금의 의료·노동 복지를 최초로 선사했다. 디즈레일리는 노동자에 선거권을 주고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불리는 영국식 복지를 완성했다. 미국 노예 해방도 공화당과 보수주의자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저돌성으로 이뤄졌다.

▶사라진 보수의 전통 가치

그렇다면 우리 보수 정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보수 진영을 자처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 작은 정부, 취약층만 선별한 소수 집중 복지, 건전 재정, 군인·경찰 등에 대한 우대, 강력한 국방 등 보수 정치의 전통 가치나마 일관되게 지켜 왔는가. '글쎄'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오히려 대선을 목전에 둔 현재 언더도그 보수 정당이 보이는 모습은 정치 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닌 이익집단 속 기득권 싸움의 전형처럼 보인다. 이미 대선은 물 건너간 걸로 보고 이후 당권과 지방선거 공천을 놓고 이전투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된다. 차분히 위기를 추스르고 정치 철학을 기반으로 유망주를 양성하기보다 대선 때마다 밖에서 메시아를 찾는 정당이 어떤 성적표를 받는지는 최근 대통령 탄핵 사태가 입증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