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가 인상·인건비 지원 등 추진 "없는 것보단 낫지만 늦어"

현장에선 "붕괴는 기정사실"·"이제 되돌릴 수 없어" 회의적 반응도

(서울=연합뉴스) 김잔디 기자 = 장기화한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들의 업무 공백이 지속하면서 최일선에서 환자를 받는 응급실에 과부하가 걸렸다.

현장에 있는 응급의학과 의료진들은 오랜 기간 누적된 인력 부족과 저수가 등이 현 사태를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응급의료체계는 '붕괴 직전'에 처했다고 입을 모았다.

응급실 붕괴는 기정사실이며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회의적인 반응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는 인건비와 수가를 인상하면서 응급실이 파행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 '환자 못 받아요' 응급실 진료제한 속출…"이미 붕괴 확정"

27일 의료계에 따르면 '빅5' 병원 등 서울 시내 주요 응급실 대부분은 지난 2월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이후 지속되는 인력난으로 파행을 겪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정규 시간 외 안과 응급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알렸고, 세브란스병원은 성인·소아 외상 환자 등을 수용할 수 없다고 공지했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은 인력 부족으로 정형외과 응급 수술과 입원이 불가하고,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은 혈액내과 신규 환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후 응급실 진료 제한은 일상이 됐고, 사태가 예기치 못하게 장기화하면서 이제는 상황이 버티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현장 의료진의 전언이다.

최근 코로나19 유행과 온열질환자 급증으로 평소보다 응급실을 찾는 환자는 늘어난 가운데 그간 응급실을 지켜온 전문의들이 과로에 시달리다가 결국 하나둘 병원을 떠나면서 현장은 한층 더 안 좋아졌다.

아주대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던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당초 14명이었으나 의정 갈등 속에서 이 중 3명의 사직서가 수리됐다. 최근에는 남은 이들 중 4명도 사직서를 냈다.

건국대 충주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 7명 전원이 최근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서울 서남권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이화여대목동병원은 응급실 당직 근무를 전문의 한명이 맡아야 할 정도로 인력난이 극심하다.

서울 시내 한 병원 관계자는 "추석 연휴에는 동네 병의원이 모두 쉬다 보니 응급실에 환자들이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가뜩이나 적은 인력으로 돌아가는데 과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국내 응급의료체계의 붕괴는 이미 시작됐다'라거나 '지난 2월 이전으로는 절대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가뜩이나 고질적 저수가와 형사소송 부담 등으로 인해 응급실 인력은 늘 부족한 상태였는데 현 사태를 계기로 붕괴가 앞당겨졌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서울의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응급실은 사람을 뽑으려 해도 못 뽑는다"며 "인력 부족은 전부터 쌓여왔던 건데 이번에 완전히 무너지게 생겼다"고 토로했다.

◇ 정부, 인건비 지원 추진…현장 '더 과감한' 인상·형사소송 면책 주문

정부는 응급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현장 의료진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경증 환자는 지역 병의원을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우선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가산하고 권역·지역 응급의료센터의 전담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추석 연휴에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응급진찰료 수가 가산을 기존 응급의료기관 408개에서 응급의료시설로 확대 적용해 경증 환자를 분산할 방침이다.

또 경증 환자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 내원 시 본인 부담분을 기존 50∼60%에서 90%로 상향하기로 했다.

의료계에서는 정부 정책의 방향성에 공감하면서도 아직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늦었다"면서 "한시적인 수가 인상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대한응급의학회는 "경증·비응급 환자의 본인 부담 상향, 중증 응급환자와 야간 진료에 대한 보상 강화 등 정부 대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응급의료의 어려움 속에서야 발표된 것은 만시지탄이며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경증 환자의 본인 부담을 대폭 상향하겠다는 정부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정부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며 "현장에서 경증·중증을 의료진이 판단하게 될 텐데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의료계는 응급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수가 인상과 형사소송 면책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수진 고려대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수가를 지금보다 5∼10배는 올려서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진료과목 특성상 민형사 소송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러한 법적 부담을 완화해줘야만 자긍심을 갖고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 회장은 "응급치료에서 형사소송은 100% 면책이 돼야 하는 게 당연하다"며 "지금은 의료계와 정부 간 신뢰가 사라졌다. 정부가 사과하고 의대 증원을 백지화해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jand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