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패트릭 잡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는 노르웨이 상륙 작전에서 해군 정보국장 보좌였던 이안 플레밍의 소속 특수부대 한 팀을 이끌고 기습작전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민간인과 관련된 업무는 수행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어선을 이용해 독일 나치로부터 많은 민간인을 구해냈다. 이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곤경에 처해졌다. 하지만 노르웨이 국왕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작위를 수여하는 덕분으로 형 집행이 유예되었다.
한참 후 그는 이안 플레밍이 쓴 소설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자신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자 그는 이안 플레밍에게 본드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며 본드처럼 애주가도 아니고 자신은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랬던 패트릭은 10년 전 90세로 세상을 떴다.
헌데 그 제임스 본드 역을 제일 많이 맡았던 로저 무어도 며칠 전 90세로 별세했다. 우연이었을까? 아무튼 지금까지 25 편의 007 시리즈가 선보였다. 진지한 내용의 첩보물이라기 보다는 그저 사전에 미리 잘 알고 있었다는 듯 모든 일을 척척 처리하고 중간 중간에 본드 걸과의 염문을 가미한 그런 오락물들이었다.
생(生)과 사(死)를 넘나들며 결코 안일할 수 없는 첩보원의 직업에 대해 심각성보다는 환상적 매력만을 느끼게끔 하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다니엘 크레이그가 6대 본드로 등장하고부터는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기는 했다.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이 말끔히 차려입은 댄디보이나 윙크 한 번에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따라오는 플레이보이 같은 그런 모습은 없어지고 대신 얼굴에서 상처가 가실 날이 없는 본드,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곤경에 처해 힘들어하는 본드, 얻어맞고 피 흘리는 본드 그리고 여자로부터 퇴짜도 맞고 문란하지 않은 성(性)을 보여준 그런 본드로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인간미를 보였다.
다니엘이 처음 나온 영화에서는 초창기 본드 이야기가 나온다. 본드도 처음엔 상부의 지시를 어겼다가 위기를 맞지만 다시 인정을 받고 살인면허와 함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다가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 모든 것을 반납하려는 순간 그녀가 살해당하면서 영원한 싱글의 사나이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본드가 부여받은 살인면허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절대의 제재가 들어가 있는 족쇄로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유의지의 선택일 게다.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지키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리고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다.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부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무섭도록 엄격하게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마땅한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아는 영성물이기를 바라셨던 거다.
허나 영악한 인간은 이를 어긴 대가로 죽어야하는 숙명과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노동과 해산의 고통이라는 수고를 안게 되었다. 그리고도 완전한 자유의지를 누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 신(神)은 인간에게 또 다시 십계명이라는 시행 규칙을 주셨다.
그 중 하나가 '살인금지 면허'가 아닌가. 자유의지 면허를 부여받은 우리 모두 권리를 함부로 휘두르지 말고 절제하고 책임질줄 아는 그런 본드처럼. 그러나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던 패트릭이 되어보면 어떨는지. 로저 무어의 명복을 빈다.
2017-05-30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