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10일 안에 남친에게 차이는 법'이란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하루 자식들이 모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되자 아버지는 옷을 몽땅 던지고는 벌거숭이가 된 채로 집안을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중얼거린다. "이렇게 편한 걸…"
남의 이야기 일 뿐일까? 우리는 종종 모든 걸 벗어 던지고 그대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체면 형식 없이 편안함 그리고 안락함을 만끽하면서. 사람들은 물론 식구들과도 거리를 두고 텅빈 집에서 혼자서 말이다. 스트레스에서 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고 싶다 보니 그런 충동이 더한 거겠지.
그래서 그럴까? 최근 들어서 많은 이들이 혼자 생활을 즐기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등의 말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들리는가 했는데 어느새 '혼족'을 넘어 '홈혼족'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일명 홈 루덴스(Home Ludens)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빗대 '집에서 혼자 논다'는 말이다. 이것 저것 신경 안 쓰고 남의 눈치 안보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20~59세 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여가시간에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답이 7할 가까이나 나왔다. '집이 제일 편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서'라는 거다.
하지만 이는 갑자기 생긴 새로운 문화가 아니다. 덴마크의 휘게(Hygge)라는 문화나 핀란드의 칼사리캔니(Kalsarikanni)가 바로 그것들이다.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한다.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것이니 우리말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눈이나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보며, 촛불 켠 방 안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게 바로 휘게다. 칼사리캔니는 흔히 '팬츠드렁크'라고도 하는데 텅 빈 집에서 편안한 옷차림과 자세로 혼술을 즐기며 소일하는 것이다.
헌데 이런 문화가 어디 서양에만 있을라고.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여가를 탐닉하는 탁족(濯足)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내린 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쉬는 이른바 풍즐거풍(風櫛擧風)이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텅 빈 집에서 혼자 가장 편안한 옷을 걸치고 (벌거벗어도 좋겠지), 가벼운 간식 그리고 약간의 술과 함께 부담 없는 영화나 음악을 감상한다면 그야말로 말을 해 무엇 하랴! 일 게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필가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한때는 외출 없이 집에만 머무는 이들을 두고 방콕족이니 나홀로족이니 하며 경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여가시간이 존중 받는 '인도어(Indoor) 라이프'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홈 루덴스 만세?
2019-06-26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