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16세기 이후 귀족이 몰락하면서 귀족보다는 낮지만 자영농보다는 높은 계층이 생겨났는데 이를 릫젠트리(Gentry)릮라 불렀다. 말하자면 신분상 귀족은 아니면서도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는 중산 상층의 자유민을 말한다.
당시 영국은 철저한 장남 상속 제도여서 귀족 작위와 대부분의 재산은 장남만이 상속받았고 차남 이하는 제외됐다. 따라서 이들은 명색이 귀족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체면상 낮은 지위의 직업보다는 고귀한 일로 여겨졌던 성직자나 군인을 주로 택하면서 젠트리로 편입되었다. 우리로 말하면 일종의 양반계급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릫오만과 편견릮 이다. 1813년 발표된 이 작품은 결혼을 부(富)와 사회적 지위 획득 수단으로 삼아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등 젠트리 계급의 숙녀와 상류 계급의 신사 사이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젠트리는 겉으론 고상한 척 위선을 떤다. 이런 젠트리의 이중성은 선(善)과 악(善)의 상반된 인격을 지닌 인물을 그린 로버트 스티븐슨의 릫지킬박사와 하이드릮 그리고 윌리엄 새커리가 쓴 풍자소설 릫영국의 속물열전릮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흔히 릫고상한 척, 신사인 체하는 속물릮을 릫스노브(snob)'하다고 한다. 그 어원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때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학부생들은 입학 서류에 자신이 귀족인지 아닌지를 적어야 했는데 평민 출신인 경우 '귀족이 아니다'란 뜻 'without nobil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sine nobilitate'를 줄여 's.nob'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케임브리지 학생들이 대학생이 아닌 시민을 미천한 계급이었던 구두 수선공을 가리켜 사용한 은어 'snob'이라고 불렀던 것이 후에 그 의미가 확대되어 중류층, 상류층까지 포함하면서 사용됐다. 이는 즉, 상류 사교계의 일원이 되기에 교양이나 취향이 좀 부족한 사람까지도 지칭하게 되면서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컸던 말이 '신사인 체하며 허세부리는 사람' 으로 변한 거다. 우리로 말하자면 '빈대떡 신사'인 셈이다.
가난하고 별 볼일 없던 북해 한 구석의 조그만 섬나라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일순간에 해양강국으로 발돋음 한 후, 젠트리 식의 두 얼굴 전략을 내세워 온갖 침략과 수탈로 세계의 반의반을 지배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영광을 누렸던 영국. 영국이 그나마 국제사회에서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목숨까지 걸고 나서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미덕 때문일 게다.
최근 배우 윤여정이 영국 아카제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이 화제다. "모든 상(賞)이 의미가 있지만 특히 '고상한 척하는(snobbish)'것으로 유명한 영국인이 (나를) 좋은 배우로 인정해줘 의미가 있고 영광"이라고 한 말이 폭소를 터뜨리게 한 거다.
자신들의 바로 이러한 이중성의 빛과 그림자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영국인들이기에 윤여정의 시니컬한 유머를 웃음으로 포용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그들의 가식적 고상함(?)과 포용의 양면성이 아닐는지.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타국인이 우리를 향해 '점잖은 체 하는 한국 양반님네들이…'하면서 어쩌구 저쩌구 했다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021-04-27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