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불(英佛)의 백년 전쟁 때 프랑스의 칼레 시는 영국군에 포위되었지만 완강히 저항하다 11개월 만에 항복했다. 칼레 시의 완강한 저항에 분노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한 가지 조건만 제시했다. 칼레의 지체 높은 시민 6명이 맨발에 속옷만 입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성 밖으로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면 6명을 교수형 시키는 대신 모든 시민들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았었다. 그때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일어나 “내가 그 중 하나가 되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뒤이어 시장·법률가 등 귀족 5명이 앞으로 나왔다.
다음 날 6인의 시민 대표는 마을 광장에서 영국군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통곡 속에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보냈다. 영국 왕은 처형을 명했지만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사면을 하자고 설득해서 6명은 살았다. 극적인 반전(反轉)이었다. 칼레 시를 대표했던 6인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가진 자의 덕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노브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인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 유일한 박사가 떠오른다. 어려서 미국 유학을 떠나 공부한뒤 귀국해서 유한양행을 세워 성공한 기업인이다. 그는 1971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이 받은 유산은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가 전부였다.
9살의 어린 아들을 미국에 보낸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장로는 밤낮으로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잡화점, 비단장사 등 여러 장사에 성공 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싱거(Singer)미싱 평양 대리점을 경영할 만큼 사업 능력도 좋았다.
그는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어린 아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 유학을 강하게 반대했다. 종교문제로 남편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아내는 장남의 유학 문제로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상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장로가 9살짜리 어린 아들의 유학을 보냈던 것은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어린 유일한은 미국에 체류하면서도 한 번도 조국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대학을 졸업하고, 27세였던 1922년에 나이로 대학동창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1925년 중국인 의사 호미리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보고 영구 귀국을 결심한다. 안정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한 것은 고생을 각오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귀국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시작이었다.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았던 유일한 박사는 절제와 검소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품은 구두 두세 켤레, 양복이 두 세 벌, 그리고 나머지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가지 소지품뿐이었다고 한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없고 삶의 영향력이 없을까?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누릴 것 다 누리기 때문이지 않을까?
2021-05-24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