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
2024-12-03 00:00:00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민중의 저항을 이끄는 책 '호민론(豪民論)'을 썼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민중뿐인데,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왜 민중들을 업신여기고 가혹하게 부려먹는가?'라며 민중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눴다. 항민은 관의 지시에 순종하면서 사는 계층, 원민은 관의 착취에 원성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계층, 호민은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저항하고 일어서는 계층을 말한다. 말하자면 홍길동이 바로 그런 호민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슷한 듯 다른 호민의 역사가 있었다. 공화정 시절의 로마는 집정관, 원로원, 평민회로 서로 견제하는 균형 잡힌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집정관은 행정부의 수반이요, 원로원은 의회였고 평민회는 집정관의 독재권력과 원로원을 장악한 귀족 계급을 견제하는 호민관을 뽑았다. 즉, '호민관'(護民官)은 기득권의 폭력과 탐욕으로부터 민중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선출된 직이었다. 억압받는 사람을 보호하고, 가벼운 위법 행위는 사면해 주었으며, 시민의 적을 탄핵하는 구실도 했다. 그 외에도 집정관과 원로원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필요하면 정부의 기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등 집정관에 맞먹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 호민관들 중 그라쿠스 형제가 있었다. 형 그라쿠스는 로마의 가난한 민중들에게도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줄 토지개혁을 시도했다가 원로원에 의해 무산되고 암살되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동생 그라쿠스 역시 더욱 푹넓은 사회 개혁정치를 펴려다가 살해되고 만다. 하지만 30여년 후 그들의 역사적 성과와 정신은 살아남아 시이저(Caesar)로 이어졌다. 흔히 독재자라고 비난받는 시이저는 민중의 벗이기도 했다. 그가 서민들의 빚 탕감 등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려하자 이에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귀족정치의 기반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공화정의 적'으로 몰아 암살했다. 그러자 그라쿠스 형제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들고 일어나 암살자들을 추방함으로써 시이저를 역사의 승리자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외형적으로는 집정관이었으나 내적으로 호민관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허균이 말한 호민의 '호'자가 호걸 호(豪)자에서 보듯 재력과 권세를 지닌 자로 민중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자를 뜻한다. 로마 호민관의 '호'자는 도울 호(護)자로 피지배권을 보호하고 도우면서 지배권을 감독하는 관직을 말함이니 글자는 서로 달라도 민중을 대변하고 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의미에서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겠다. 테슬라CEO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지명됐다. 정부 조직을 효율화하고 관료주의를 해체하기위해 선택된 일종의 '기업 호민관'으로써 반관료주의 타파를 위한 트럼프 정부개혁의 칼자루가 된 것이다. 헌데 실리콘밸리에서 오래 전부터 미래 예견과 재정관리 능력에 정평이 나있던 일론 머스크를 가리켜 전기자동차 전문지 편집장 찰스 모리스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미국의 개혁을 넘어 세계까지도 염두를 두고 있다는 말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그가 이제 막강한 권력까지 쥐고 개혁 수술의 메스를 든다. 그 결과가 몹시 귀추되지만 그도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이무기 교(蛟)자. 어쩐지 '왕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혁명의 기치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머스크의 개혁의 칼사정이 같은 듯 다른 듯 겹쳐 보인다. '진정한 권력은 절제'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2024-11-14 00:00:00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洞口)'라는 이 시(詩)에서 처럼 판소리는 거칠고 쉰 소리로 부른다. 성대를 누르고 목을 파열시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창극조라고도 불리는 판소리는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음악양식으로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 '판'과 노래를 말하는 '소리'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면 어디서나 가능한 일장 판극이란 말이다. 서민들의 일상 언어와 걸쭉한 욕설도 들어있는 사설을 통해 당시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반영됐다. 이 때문에 판소리는 그들로부터 외면당했으나 심중을 파고드는 해학과 풍자의 매력으로 후에는 양반들의 잔치에까지 초청되면서 모든 계층이 좋아한 장르가 된 것이다. 판소리는 각 판마다 고수의 북 장단에 따라 소리꾼 한 사람의 '창'과 사설을 늘어놓는 말인 '아니리' 그리고 몸짓인 '너름새'로 길고 긴 이야기를 엮어간다. 이때 북치는 고수(鼓手)는 장단만 치는 것이 아니라 '얼씨구', '좋다', '그렇지' 등의 추임새를 중간 중간에 끼어넣어 소리를 한껏 살려낸다. 이를테면 소리꾼과 고수가 대화하는 셈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경군들과도 때때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순발력도 발휘한다. 해서 역시 음악을 중심으로한 무대 종합예술인 서양의 오페라가 무대에서만 정해진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과 달리 판소리는 마당이건 시장이건 어느 곳에서건 구경군들과 호흡을 맞추고 대화하면서 인생을 논하는 삶의 현장이었던 거다. 헌데 소리꾼은 혼자서 극 중 모든 캐랙터의 역할을 다 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의 음역대 변화가 뛰어나야하고 다양해야 하는 어려움과 목을 파열시켜 나오는 거친소리를 내기 위해 피눈물나는 연습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명창(名唱)은 그리 쉽게 나오지 못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유일무인한 1인 오페라인 판소리는 본래 열두마당이었지만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다섯마당만 전해지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특수성과 독창성,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3년 유네스코(UNESCO)로 부터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도 선정되었다. 서양에서 오페라의 영향으로 생겨난 뮤지컬이 있다면 판소리의 가지에는 창극(唱劇)이 있다. 창극은 여러 사람이 배역으로 나누어 소리와 극으로 연출한다. '창극 심청'이 이미 세계화에 나섰고 그리스의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도 영역을 넓히며 현대적 장르로 진화중이다. 한국의 소리를 프랑스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한국소리 페스티벌(K-Vox Festival)'은 벌써 12년이나 됐다. 이 외에도 빅뱅의 지드래곤은 '얼씨구 절씨구 잘도 놀아난다'는 가사의 '늴리리야'로 해외에서도 최고의 호응을 받았으며 전통 군례악을 힙합과 결합시킨 BTS의 '대취타(大吹打)'가 빌보드에 오르는 등 국악과 K팝의 콜라보레이션은 때론 신명나게 때론 애잔하게 대중에 스며들고 있다. 더우기 최근 인기 상승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판소리, 국극 소재 드라마 '정년이'의 첫 OST는 '밴드 이날치'의 '새타령'이다. 그러니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K-문화를 향한 찬사에 국악이 예외일리 없는 것은 K팝이 우리만의 색깔로 흥할 수 있게 된 오랜 뿌리가 바로 국악이기 때문이며 세계로 그 전통을 이어가는 국악인들의 자존심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런 판국에 한국의 모 국회의원이 국감에서 국악인들의 가야금 연주 공연을 두고 '기생인가, 기생집인가!'라고 한 폄하 발언에 명창 등 국악인 20여명이 분노하고 기자회견을 갖는 등 그 파장이 일었다. 자기 문화만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자문화 중심주의'도 문제지만 자기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문화 사대주의적 태도'는 비굴하고 비루한 것이다. 수궁가를 모티브로 한 퓨전 판소리에 이런 게 있다. '난감허네~!'
2024-10-29 00:00:00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 병사가 큰 고목 앞에서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노파는 그 나무 속 깊은 구멍 속 밑바닥에 있는 많은 돈을 갖는 대신 부싯돌 상자 하나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병사가 웬 횡재인가 싶어 허리에 밧줄을 매고 나무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세 개의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는 각각 금, 은, 동으로 된 동전들이 가득했고 눈이 아주 큰 개들이 앉아 지키고 있었다. 노파가 준 앞치마를 펼쳐 그 위에 개를 앉히니 얌전해져서 병사는 돈들을 가득 챙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부싯돌 상자도 가지고 나왔다. 갑자기 상자 내용이 궁금해진 병사는 노파에게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답을 해 주지 않자 그녀를 죽이고 가지고 나온 돈과 부싯돌 상자까지 챙겨 달아났다. 때아닌 일확천금으로 부유해진 그는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주고 호화로운 생활에 돈을 마구 쓰다보니 어느새 빈털털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공주가 평범한 군인과 결혼하게 된다는 예언에 화가난 왕이 공주를 성탑안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병사는 부싯돌 상자를 떠올리고 부싯돌을 한번 치자 첫번째 개가, 두 번을 치자 두번째 개가, 세 번을 치자 세번째 개가 나타나 돈들을 가져다 주어 다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개들에게 공주도 몰래 데리고 오게 해 지내다가 그만 꼬리가 잡혀 사형위기에 처했다. 죽기 전에 담배 한대만 피우겠다는 청을 올리고 부싯돌을 치자 개들이 나타나 왕과 왕비, 대신들을 모두 공격해 몰아내고는 병사를 구해주었다. 겁에 질린 군중들은 병사를 왕으로 추대하고 공주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안데르센의 '부싯돌 상자' 이야기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요새 기준으로 말하자면 R등급이랄 수 있다. 당시 유럽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지적이랄 수도 있지만 이유없는 폭력과 살생 그리고 납치 등의 어두운 면이 많아서다. 그래서 그런지 '부싯돌 상자'는 '일확천금'이나 '폭력' '전쟁' 등의 키워드로도 잘 쓰인다. 이 동화가 떠오른 것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 보도 때문이다. 최근 해외 언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부싯돌 상자'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북 아시아에서는 남북한은 물론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에 엄청난 병력과 화력이 집중돼 있다. 자칫 잘못하면 부싯돌 상자에서 위험한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이러한 상황에 러시아 푸틴은 지금 사면초가다. 병사가 부족해지자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을 통해 메꾸었다. 하지만 프레고진 숙청으로 용병들이 흩어져 그마저도 바닥이 나자 북한 김정은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무기고도 비었다. 이러한 푸틴의 절박한 요구에 북한이 최정예 특수부대 병력10,000 여명 파병을 준비하고 선발대는 이미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남북한 연결도로와 철도 폭파 등 한반도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들 북한 병력의 배치가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김정은이 요구할 '비용청구서'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마도 핵무장 기술고도화와 이에 따른 여파를 배제할 수 없을거다. 이러한 푸틴과 김정은의 의기투합은 1950년 스탈린-김일성 회담을 연상시키고 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국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합하는 국제질서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욕망과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경고했던 부싯돌 상자! 모쪼록 그 부싯돌이 전쟁의 불씨가 아닌 평화와 번영의 불씨를 되살리는 상자가 되었으면 한다.
2024-10-15 00:00:00
그리스 테베 왕 라이오스는 '새로 태어나는 아들이 장성하면 생명과 왕위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신탁(神託)을 받는다.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양치기에게 죽여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양치기는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산에 둔 것을 또 다른 목동의 손을 거쳐 이웃나라의 왕자로 성장하게 된다. 수년 후 장성한 그는 비좁은 언덕 길에서 만난 라이오스와 길 양보로 인한 시비가 붙은 끝에 그를 죽이게 되고 테베로 가 왕이 되었다. 그가 오이디푸스(Oedipus)다. 그리고는 왕비와 결혼했으니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결국 생부를 살해하고 생모와 부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긴 세월이 흐른 후 테베에 전염병이 돌자 신탁에서 그 이유가 밝혀진다. 그러자 왕비는 수치심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제 눈을 뽑고 방랑길에 올랐다. 2010년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가 이를 토대로 쓴 소설이 영화화되었다. '그을린 사랑(Incendies)', 레바논판 오이디푸스다. 기독교인 나왈은 이슬람교도 와힘과 사랑에 빠지고 아들을 낳는다. 나왈은 가족의 수치가 되고 그의 가족은 와힘을 죽인다. 아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이후 나왈은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죽이게 되고 감옥에 간다.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 양쪽의 피를 물려받은 나왈의 아들은 자라나 이름을 바꿔가며 변신한다. 이에 따라 그는 때로는 기독교인과, 때로는 이슬람교인과 적이 되어 싸운다. 나왈은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받다가 죽는다. 그리고 성고문으로 낳은 쌍둥이에게 아버지와 형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하고 장례를 치러 달라고 유언한다. 쌍둥이들은 아버지와 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형이 바로 나왈을 성고문했던 자로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서로가 이부남매(異父男妹)이자 부모-자녀라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이었던 거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레바논 내전으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앙갚음 복수, 그 악순환의 참담함을 그렸다. 소설 속 그을려진 어머니의 과거, 충격적인 현실,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그 누군가 등 이 모두가 바로 지금의 레바논 비극이자 눈물인 거다. 200여 개나 되는 이슬람 종파는 그 중 사우디가 중심인 수니파가 가장 크고, 이란을 종주국으로 하는 시아파가 그 다음이다. 무함마드 계승자였던 알리의 차남 이맘 후세인은 시아파의 태두였지만 수니파에 의해 칼에 난자당하고 말발굽에 짓밟혀 처참하게 죽는다. 이것이 그의 죽음으로 시아파가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그리고 국민들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라며 순교를 강요당한다. 지난해 10월 가자지구의 시아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습하자 이스라엘은 월등한 화력으로 하마스를 무력화시키고 이어 레바논을 거점으로 하는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 궤멸 작전에 들어갔다. 무선호출기와 무전기 폭발로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 보복을 천명하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핵심 지휘관 모두를 피살하고 집중포화와 지상군 작전을 시작하면서 수도 베이루트가 초토화되고 있는 거다. 헌데 이상하게도 레바논은 이렇다할 반격이나 보복 천명 등 아무 반응이 없다. 왜일까? 국가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레바논은 독립 후 기독교와 이슬람 신자 사이의 잦은 분쟁으로 15년의 내전이 지속되면서 나라가 거덜날 지경이 되자 국제사회의 중재로 기독교,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3부요인 자리를 나눠 맡는 '종파 간 삼권구도'로 되었다. 목적은 공평성이었지만 의도와 달리 책임없이 각자의 사익만 챙기는 추악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되어버려서다. 무장 단체 헤즈볼라는 이런 틈을 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소탕한다며 이스라엘이 무섭게 폭격을 퍼붓는데도 레바논 국민은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채 길바닥으로 내몰리고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는 생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눈물을 더 흘려야 하는 것일까? 이를 닦아줄 그 어느 신(神)도 없는 것일까? Miserere Deus! (신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2024-10-01 00:00:00
세계일주 중이던 네덜란드 상선 '에라스무스 호'가 난파되어 일본의 한 항구로 떠밀려 왔다. 1600년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조선과 명나라 정벌에 실패한 후 쇼군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던 때, 유럽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이 일본에서의 가톨릭 선교권과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형국이었다. 에라스무스 호의 항해사는 영국인 블랙손이었는데 통역관으로 그에게 예수회 신부가 지정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종교적으로 적대국인 영국인 블랙손과 네덜란드인 선원들에 대한 반감으로 통역도 대충 해줄 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협조하지 않았다. 헌데 블랙손이 군사적, 외교적으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 지역 제후 토라나가는 그에게 가톨릭 신자이자 포르투갈어에 능한 유부녀 마리코에게 통역을 맡긴다. 자연 두 사람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한편 블랙손은 토라나가를 따라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와 정치적 암투 현장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다. 드라마는 당시 일본문화와 생활상 등에 대해 잘 묘사해 주고 있었는데 한 예로 표류해온 블랙손에게 커다란 둥근 나무통(お風呂:おふろ)에 더운 물을 뎁혀주고 들어가 목욕하라고 하자 삶아 죽이는 것으로 오해하고 질색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무튼 결국 에라스무스 호가 불타 없어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블랙손은 절망한다. 라이벌인 예수회 신부가 방화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실은 토라나가의 짓이었다. 이용가치 있는 블랙손을 영원히 자기 곁에 두고 가신(家臣)으로 만들기 위한 심산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블랙손은 수군을 창설하자는 토라나가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에라스무스 호를 재건해 고향 영국으로 돌아간다. 실제 영국인으로 일본에서 무사계급을 받은 윌리엄 애덤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에 만들어졌던 영어로 된 미국 드라마 '쇼군'이다. 헌데 올해 '쇼군'이 리메이크되어 새로 나왔다. 여러 면에서 다르게 각색되었지만 제작진과 스태프가 미국인들인 반면 출연진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70% 이상이 일본어 대사로 되었다. 예전의 '쇼군'에 비해 오리엔탈리즘이 많이 희석됐고 역사 고증에 더 충실했다는 평이 나오더니 지난 15일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18개 부분의 상을 휩쓸었다. 그러자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이번 일본어 드라마가 미국에서 흥행한 것은 '오징어 게임'같은 한국 드라마의 약진이 토양을 만든 덕이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외국 영화와 드라마를 더빙으로 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한국 드라마 성공을 계기로 해서 영어 자막으로 보는 데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2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인상적인 소감을 남긴 바있다. '자막의 장벽, 1인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자막을 싫어하는 미국 관객과 할리우드의 '영어 중심주의'를 향한 날카로운 일갈이었다. 오늘날 한류가 세계 중심에 서기까지에는 당사자들의 각고의 노력과 재능은 물론이지만 그 이면에는 유명함과는 별개로 미래를 향해 묵묵히 신념을 가지고 걸어온 국내외 많은 이들의 시간과 땀이 켭켭이 쌓이고 쌓인 오랜 세월의 밑거름이 토양을 일궈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같은 문화권 나라 테두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60여년 전 극동아시아 콘텐츠의 우수함을 알린 '쇼군'의 인기가 있었기에 '오징어 게임'이 신화를 낳을 수 있었고 다시 그 성공신화의 후광에 힘입어 올해 '쇼군'이 18관왕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 어떤 것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모든 일은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어서다. 마치 이 땅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종과 성차별 그리고 억압을 견뎌온 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24-09-19 00:00:00
'죽고 사는 길이 / 여기 있음에 두려워하고 / 그대 간다는 말도 / 못다 이르고 가는가 / 어느 가을 이른 날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이파리같이 / 한 가지에 나고서도 /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 아으!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 도 닦고 기다리리.' 신라 월명사 스님이 지은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 누이와의 사별에 따른 애절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노래한 추모시다. 이처럼 한 가지에서 나고서 '나 먼저간다'는 말조차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의 비운과 남겨진 이들의 견뎌야 하는 고통도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 또한 듣는 이들의 가슴을 도려낸다. 뉴욕 9·11 추모 박물관에는 브라이언 스위니란 남성의 음성 메일이 보관돼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나던 날 아내 줄리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시어머니는 아들 브라이언이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에 추락한 비행기에 타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급히 집으로 돌아온 줄리는 앤서링 머신에서 그의 목소리가 남겨진 것을 발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 비행기 뒤에서 건 전화 메시지였다. 그가 타고 있던 납치된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기 3분 전 기내 전화로 아내의 번호를 눌렀지만 연결되지 않자 음성을 남긴 것이었다. '여보, 나야. 비행기가 납치됐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항상 즐겁게 지내기 바래. 그리고 부모님에게도. 모두에게도.' 죽음 앞에서 아내에게 사랑을 전한 그의 목소리는 무척 차분했다고 한다. 각종 재난이 있을 때마다 전해지는 죽음을 맞는 순간의 이같은 절절한 마지막 말들은 '살이 베여 떨어져 나가는 아픔'일 수 밖에 없다. 지난 2일 아들의 죽음에 참척의 고통을 극복하고 승화된 메시지를 전한 한 엄마의 추도사가 있었다. 지난해 친구들과 함께 이스라엘-가자 국경 부근에서 열린 음악축제에 갔던 허쉬는 하마스 테러 당시 수류탄 폭발로 왼팔을 잃는 사고를 당한 뒤 납치됐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상담교사로 일하는 레이철 골드버그-폴린은 '누구라도 어디서든 제 아들 허쉬를 만나면 보살펴주세요. 그는 저의 전부입니다. 가자 지구에서 사는 분들도 엄마가 있겠지요. 저도 엄마로서 어디서든 어려움에 처한 여러분의 아이를 도울게요'라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누구라도 어디서든(someone somewhere)'은 모든 이에게 전해지면서 인질 석방 캠페인에 불을 붙이게 했다. 그러는 한편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국제기구와 미 정치권에도 참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조건을 견뎌낸 허쉬는 지난 4월 왼쪽 팔이 없는 상태로 하마스 공개 영상을 통해 보여지면서 가족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는가 했으나 지난 1일 라파 지하터널 부근에서 다른 5명의 주검과 함께 시신 상태로 발견됐다. 아들 허쉬가 끌려가기 직전 보냈던 메시지는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미안해요'였다. 이에 레이철은 지난 2일 있었던 아들 장례식에서 '엄마는 지난 332일 매일 1밀리 초(millisecond)마다 괴로웠고, 내 영혼은 3도 화상을 입은 듯 했다.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허나 이제 자유롭게 떠나거라, 내 아들'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이젠 네게 부탁하마. 우리가 시련을 견디며 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네가 지켜다오'라며 추도사를 끝맺었다. ('아아! 미타찰에서 다시 만날 우리 / 열심히 살아가며 기다릴 것이리라! 祭亡子歌)
2024-09-03 00:00:00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당시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에서 역사서 '속일본기 (續日本紀)'를 인용해 '50대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 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며 백제 25대 무령왕과 어떤 관계일까? '속일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 이라는 사람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황태후의 성은 화(和)씨라고 말하고 있다. 헌데 31대 요메이(用明) 천황과 그의 아들인 쇼토쿠 태자의 성 또한 화(和)씨로 백제 무령왕의 성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쇼토쿠 태자는 백제와 신라의 영향력에 힘입어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를 혁신하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후 천황가계는 백제계가 주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천황 가계가 한 핏줄로 이어진 것처럼 조작해 왔다. 아무튼 쇼토쿠 태자는 당시17조 헌법의 첫머리를 '화(和)로써 귀하게 여기며…'로 시작할 만큼 화를 중요시 했는데 바로 이 화목할 화(和)자가 일본의 집단 정신문화를 칭하는 글자인 셈이다. 해서 예를 들어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일본음식인 일식은 사실 화식(和食)이 더 맞는 말이고 한국 소고기를 한우(韓牛)라고 하는데 비해 일본 소고기는 화우(和牛), 즉 와규라고 하는 데서도 알수 있다. 이 외에도 일본옷을 화복(和服), 일본과자를 화과자(和 菓子) 등이다. 헌데 이 화(和)자 앞에 큰 대(大)자 하나를 덧댄 대화(大和)는 '야마토'라 해서 교토 인근을 중심으로 했던 고대국가에서 출발해 3세기- 7세기 중엽 일본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한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으로 '일본'이란 국호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용했던 말이다. 그랬던 만큼 '야마토'는 일본 자체를 상징하고 '야마토 정신(大和魂)'이라하면 일본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야마토'란 말이 언급된 한국어 노래가 일본 야구장, 고시엔(甲子園)에서 울려퍼지면서 일본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전국 3400여 개 고교가 참여한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중고생을 합쳐 160명뿐인 학교가 개교 이후 첫 우승을 한 것이다. 160명 초미니 민족학교가 멸시와 악조건을 견뎌내고 2,500명의 학교를 꺾고 승리한 기적이었다. 이 학교는 1947년 재일교포들이 세운 교토조선중학교에서 출발해 지금은 교토국제고로 바뀌었다. 2004년 일본인 학생 입학을 받은 후 학생의 70%는 일본계이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공통의 꿈과 미래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우승 후 고시엔 전통에 따라 상대 팀이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大和)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이 교가의 4절에는 '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이라는 구절도 있다. 한반도에서 동해를 건너 야마토 땅을 다스리던 훌륭한 선조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기개 넘치는 그 후손임을 다짐하는 긍지가 넘쳐 들린다. 고대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깊이 얽혀 있지만 한국내 사학계는 물론 정치권은 아직도 갇혀있는 역사관이나 소모적인 정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음이 교토국제고 학생들만도 못하지 않나 싶어 안타깝다. 교토국제고 학생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2024-08-13 00:00:00
1851년 영국 런던에서 만국박람회(Expo)가 시작되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자국의 최신 기술을 세계에 알리고 과시하는 일종의 국가 간의 산업화 경쟁의 장(場)이었다. 이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답게 야심차게 박람회를 열어 건물 전체를 유리만으로 지은 유리궁전(수정궁)을 지어 신건축을 자랑했다. 영국과 경쟁하던 프랑스는 이에 뒤질세라 여러번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1889년 에펠탑으로 수정궁을 능가하더니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한 철골구조에 대형돔과 유리로 덮은 아름다운 상징물을 설치하였다. 큰 궁전이란 뜻의 '그랑 팔레(Grand Palais)'다. 파리의 에펠탑과 함께 최대의 상징적 기념물이 된 이곳에 미국의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기 기술 그리고 유럽의 무선통신과 전자파 및 자동차 기술, 퀴리 부부의 방사선 기술 등이 소개됐다. 이때 대한제국도 참가하여 경복궁 근정전을 닮은 2층 전시관을 지었다. 화려한 색을 입힌 목조건물에 하늘로 솟은 처마와 지붕으로 한국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선보였다. 그리고는 비단과 놋그릇, 도자기, 나전칠기와 공예품, 의복 등을 비롯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세계인들에게 처음 공개했으며 조선의 투구, 검, 화살통, 군복 등도 전시했다. 대한제국은 대상 1개와 금메달 2개를 포함 모두 21개를 수상했다. 박람회가 폐막되자 대한제국관은 헐렸고 그랑팔레는 1924년 파리 올림픽 경기장으로 사용된 후 박물관(미술관)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다시 100년이 지난 올해 2024년 파리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위해 개조되어 펜싱과 태권도 종목 경기장이 되었다. 비록 대한제국관은 없어졌지만 그 발자취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펜싱 사브르의 오상욱 선수가 한국의 첫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100년을 이어온 호흡의 기운을 느끼는 듯 하다. 이어 사격과 양궁 등에서 연이은 금메달을 따내자 '금메달 세 개 땄는데 그게 칼, 총, 활이다. 무기의 나라, 전투의 나라'라는 네티즌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어찌보면 그도 그럴 것이 삼국시대 이래 930여 차례에 이른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치루어야했던 끈질긴 전투력의 DNA가 형성되어서 일게다. 그 옛날 아시아 최강인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대군을 격파했으며 거란족 요나라와 왜국 또한 물리쳤으니 태극전사란 호칭이 괜한 말은 아니다. 특히 한국 양궁은 '10년 연패'라고 하니 한 종목에서 무려 40여년을 지켜온 독보적 존재, '전설'을 넘어 '신화'라 아니할 수 없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고 하더니 과연 활의 민족 후손답다. 여담이지만 그러고 보니 네티즌들이 표현한 태극전사들의 '칼, 총, 활'의 위업을 대하면서 세계적 석학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지은 인류 문명에 대한 책 '총, 균, 쇠'가 떠오른다. 마치 '총, 균, 쇠'가 세상의 문명을 좌우했듯 이번 한국선수들이 대회 초기 기염을 토한 '총(銃), 궁(弓), 검(劍)'의 석권을 이야기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유일는지.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그래도… 1900년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와 함께 제2회 올림픽도 동시에 열렸다. 해서 당시 박람회와 더불어 올림픽에도 참가했더라면 일제강점기 이전에 자주 독립국가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세계 경기대열에 기록되어 우리의 올림픽 역사 이정표가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또 누가 알랴? 메달 입상자라도 나왔다면 금상첨화가 아니었을는지? 태극전사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2024-07-30 00:00:00
대륙간의 교류가 오늘날처럼 긴밀하지 못했던 옛시절에는 지역마다의 문화나 특산물을 해외원정 후 혹은 외부인에 의해 소개되고서야 알게 됐는데 그나마 왕족이나 귀족들의 영유물이 되기 일수였고 후에 탐욕으로 인한 침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오렌지와 레몬, 바나나 등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레몬은 장기간 항해에 문제였던 괴혈병을 막아주는 치료제로 알려지면서 더 멀리 더 오래 항해할 수 있게 해준 탓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의 해외 식민지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동남아가 원산지였던 바나나는 아랍 상인과 포르투갈 무역상들에 의해 카리브해까지 퍼지게 되었지만 착취의 대명사로 '바나나 공화국'이란 어두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유럽 고급 레스토랑 테이블에 놓이는 파인애플은 환영의 메시지다. 그런 파인애플은 콜럼버스가 중남미에서 처음으로 유럽에 가져온 후 최고급품이 되다보니 귀족들이 돈을 내고 빌려와 파티에서 자랑한 후 돌려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세계사를 뒤흔든 25가지 과일'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이렇듯 과일들의 전파와 교류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희노애락을 함께하면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다양한 이야기거리도 만들어냈다. 그 중 사막의 과일이었던 수박에 대해 한때 이런 농담도 있었다. 북한에서 겉만 빨갛지 속은 하얘서 반동으로 낙인된 사과와 달리 수박은 속이 온통 시뻘건 골수 공산당원을 의미한다는 말. 헌데 이 수박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의 상징물이 되어 버렸다. 남북 전쟁 전에는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팔던 대표적인 과일인 수박이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흑인 저소득층이 즐기는 과일이라는 편견으로 '흑인은 수박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같은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생겨나면서다. 해서 지난해 2월에는 뉴욕의 한 중학교에 급식으로 수박과 프라이드치킨을 제공한 식품회사가 사과하는 해프닝도 있었고 오바마 대통령 재임 당시 보스턴 헤럴드가 그에게 '수박 향을 입힌 치약 써본 적 있냐'며 조롱하는 만화를 게재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던 거다. 이외에도 미국에 동화(同化)되면서 모국의 정체성을 잃은 아시아계를 '바나나'라고 지칭하는 건 다분히 피부색을 염두에 둔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말이다. 헌데 이와 유사한 단어로 '코코넛'이 있다. 주류 문화에 동화하기 위해 애쓰는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계를 지칭하는 속어로 껍질이 갈색인데 속은 하얀 코코넛처럼 피부색은 아시아계이면서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이다. 헌데 이 단어가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후보를 사퇴하고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하면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카멀라는 지난해 백악관에서 열린 행사 연설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너희 젊은이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너희가 방금 코코넛 나무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니?' 라고 했다며 호탕하게 웃은 적이 있었다. 젊은 세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앞선 세대가 일구어논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기존 세대와 연결돼 있음을 피력하려던 의도였지만 공화당 인사들 사이에선 인도계인 카멀라를 조롱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 이 단어가 어느 순간 부통령의 소탈한 모습으로 부각되면서 인터넷 '밈'으로 진화해 퍼지고 지지와 응원으로 변하고 있는 거다. '카멀라'라는 이름이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이란 뜻이고 힌두교 행운의 여신의 별칭이라고 한다. 헌데 코코넛의 의미가 '유령머리'라고 하니 혹 누가 알랴? 귀신도 모를 일이 벌어질는지.
2024-07-16 00:00:00
역사적으로 성공한 군주는 대부분 충직한 신하의 보필과 현명한 부인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대표적 인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정관의 치(貞觀之治)' 시대를 구가한 당 태종 이세민을 들 수 있다. 당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난 잘못을 딛고 치세에 공을 들인 결과 중국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거다.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백성을 섬기는 마음과 신하의 간언도 마다않는 자세 그리고 정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통합의 정치 등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 이면에 있는 훌륭한 신하와 지혜로운 부인의 도움 무시 못한다. 그 충신 중 하나가 위징이다. 언제나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잘못을 지적하는 그의 직언이 얼마나 강했던지 한번은 당태종이 분노를 삭이지 못하며 그를 처형하겠다는 소리에 황후는 '신하가 굽히지 않고 바른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폐하께서 명군이라는 뜻이 아니겠냐'며 추켜세움으로써 황제의 분노도 신하의 위기도 모두 피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당태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징 같은 신하의 직언과 간언도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존중과 황후의 교만하지 않고 검소함, 백성을 배려하는 품성의 덕이었다. 허나 한비자는 군주를 망하게 하는 간신을 8가지로 분류한 '팔간(八奸)'에서 그 첫째가 '한 침대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부인과 후궁들의 일명 '베갯머리 송사'를 가리키는 말일텐데 쓰기 나름일 것이다. 해서 '권력의 크기가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에 따라 좌우된다'고 하는 이유다. 이는 동서고금에 구분이 없을 게다. 그럼 미국에서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게끔 도와 칭송받는 영부인들은 누구며 그 반대는 누굴까? 미국은 영부인이 살기 쉽지 않은 나라다. 너무 앞에 나서 활동하면 '설쳐 댄다'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으면 '자리에 있는 거냐, 없는 거냐'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남편 뒤에서 도울 줄 아는 영부인상이 어디 그리 쉬울까? 그렇다 해도 FDR 프랭클린 루즈벨트 부인 엘리노어 여사는 '너무 나서는' 영부인으로 분류되면서도 워낙 훌륭한 일을 많이 한 탓 때문인지 오랫동안 미국인의 칭송 순위 1위다. 아동, 여성,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활동과 인권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소아마비로 휠체어 생활하는 남편을 대신해 전국을 누비며 국민들의 의견까지 들어서다. 이 외에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충실한 조언자이자 부인였던 에비게일 애덤스,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영부인 돌리 매디슨 등이 유명한데 특히 돌리 메디슨은 1812년 영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백악관이 함락되기 직전 몸소 수많은 공문서와 서적 게다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까지 챙겨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이날 영국군은 백악관을 불질러버렸다. 그렇다면 반대로 최악의 영부인은 누굴까? 사치와 낭비벽에 빠져 대외활동을 가장 소극적으로 펼쳤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부인 메리 여사가 꼽힌다. 링컨이 결혼식장으로 가면서 '나는 지옥으로 가고 있소'라고 자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헌데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루즈벨트와 링컨과 달리 두 영부인이 '최고'와 '최악'으로 엇갈리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헌데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토론대결 이후 인지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용퇴냐 사수냐'를 두고 말이 많은 가운데 부인 질 바이든 여사의 목소리에 따라 좌우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서 '여사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만사여사(萬事女史)'가 떠 오르는 게 지나친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