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독일의 침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18 살이던 릴리벳은 아버지에게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고 졸라 자원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했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신병훈련을 받은 뒤 보급 부대에 배속되어 트럭 운전병으로 하루 종일 타이어를 바꾸고 엔진도 수리했다. 그리고 16년 후 남편과 케냐를 여행하던 릴리벳은 아버지의 서거소식을 듣고 귀국해 25세의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탄생이었다.
어릴 때 릴리벳으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2세는 애초부터 왕이 될 서열이 아니었다. 윈저 왕가의 장남 에드워드 8세가 계승자였지만 ‘세기의 결혼’이라 불린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재혼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거다.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와 결혼한다며 왕위를 포기하자 그의 동생이자 릴리벳의 아버지인 앨버트 공이 왕위를 계승해 조지 6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킹스 스피치’로도 잘 알려진 조지6세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심각해 실제로 중요한 연설을 망친 경우도 있어 여러방법으로 언어 치료에 애써야만 했다. 당시 영국은 에드워드 8세의 자진퇴위와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 등으로 어수선한 국면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나라의 분위기를 단합시켜줄 새로운 국왕의 탄생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난국에서 그는 다행히도 호주 출신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을 성공리에 마침으로써 국민들의 열광과 큰 신뢰를 회복하고 영국을 단합시킬 수 있었다.
지난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영국을 70년간 통치하는 동안 엘리자베스 여왕의 삶은 애환과 굴곡이 많았다. 남편 필립 공과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둔 여왕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으로 왕실의 인기는 절정이었지만 얼마후 이들과 앤드루 왕자 그리고 앤공주의 파경, 버킹엄 화재 발생 등으로 왕실이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게다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프랑스 파리 교통사고 사망에 영국 왕실 배후설이 제기되면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 기간에 영국은 대외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었다. 경기 침체와 북아일랜드 유혈 사태, 영국령 짐바브웨의 독립 등이 이어지며 여왕 재위 기간 동안 40개 이상의 식민지 국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나갔다.
그럼에도 여왕을 향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가히 절대적이다. 이는 ‘나는 대영제국과 결혼했다’로 유명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러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이끈 엘리자베스 1세와 이를 이어받아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공공건물마다에 동상이 세워진 빅토리아 여왕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해 스물다섯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 국민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하며 조용히 봉사하고 침묵하고 공개 발언을 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서다. 이러한 여왕의 ‘무언의 정치술’이 공화주의자들의 군주제 폐지 논쟁을 잠재울 수 있었던 이유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제 여왕이 떠나고 남긴 제국의 유산 문제가 고개를 들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영국의 과거 식민 지배 잔학성에 대해서, 호주 등에서는 영연방 군주제도의회의론에 대해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분리 움직임이 그것들이다.
영국의 흥망을 모두 겪은 시대의 통치자. 2차 세계대전 이후 격동기에 영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던 여왕.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하는 영국국가의 구절도 이제 바뀌었다. 여왕의 안식을 빈다.
2022-09-20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