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15일, 영국 힐즈버러 축구 경기장에서는 FA컵 준결승전이 예정돼 있었다. 일부 팬들의 전세버스가 교통체증으로 연착해 경기장에 한꺼번에 몰리게 되고 극심한 병목현상이 벌어지자 누군가에 의해 출구문까지 열렸다. 문의 폭이 불과 80 센티가 안되고 내부이동이 어렵게 설계된 구조에 관중석의 해당 구역이 이미 포화 상태였는데도 경찰은 관중들을 계속 몰아넣었다. 안쪽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압사 직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경기가 시작되면서 그라운드 쪽 관중들은 뒤에서 밀려드는 관중들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구분하는 보호철망이 무너지며 아비규환이 빚어졌다. 96명이 압사당했다. 이들 중 78명이 대부분 10-20 대 청소년이었다.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경찰은 사고를 은폐하고 술에 취한 부랑자들이 표도 없이 경기장에 난입해 벌어진 단순사고라고 발표했다. 게다가 관중들이 억지로 문을 열었다고 거짓말했으며 언론들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당시 관할 시 공무원은 안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했으며 마거릿 대처 총리조차 생존자와 희생자들을 비난하며 경찰을 옹호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경찰이 당일 경기장 통제소에서 지휘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하며 끈질긴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후 23년이 지난 2012년에 되서야 독립조사단의 보고서가 나왔다. 문을 열라고 지시한 사람은 당시 경찰 서장으로 대규모 군중관리 경험이 없는 데다가 경기장 구조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경찰이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거짓말한 사실도 모두 드러났다.
이 후 법원은 수년의 심리 끝에 2016년, 이 참사의 책임이 경찰에 있다고 판결했다. 무려 27년만의 일이다.
지난 10월 마지막 주말에 서울 이태원에서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156명이 압사당하는 핼러윈 참사가 발생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참척지변(慘慽之變)'이라고 한다. 비통함이 너무 처절하고 참담해서 가늠조차 안 되는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고(故) 박완서 작가는 아들의 죽음에 무너지는 마음으로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일기체의 글을 눈물로 썼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하느님도 너무하십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년5개월밖에 안 됐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그러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느님께 대들고 따져 물으며 '신(神)을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神),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나의 살의(殺意)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돼' 라며 통한에 통한에 몸부림쳤던 그녀는 후일 그렇게라도 분풀이할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참척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술회했다.
이러할 진대 오히려 희생자들을 모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 그리고 책임회피를 위한 발언을 뱉어내는 책임자들이 우리를 더욱 우울하고 슬프게 한다.
이제 이들의 무고한 죽음에 누가 책임이 있는지 명확히 규명돼야 할 것이다. 영국 철학자 홉스는 '국가의 원초적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다'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힐즈버러 사건조사를 주도한 테일러 법관의 말에도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무사안일이다'라는 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를 보낸다.
2022-11-08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