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여년 전 '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조선시대 젊은이들의 캠퍼스 생활을 그린 '성균관 유생들'이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문제를 안고 고심하는 스승과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백성을 생각하고 고심하는 정조의 마음을 그린 이야기였다.
아들 사도세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게 한 영조가 아비로써 비통했던 마음을 적은 문서를 담당했던 관헌이 주살 당한 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천민촌에서 숨어 자란 그 관헌의 여식이 오빠 신분으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만 금녀의 캠퍼스 성균관에 들어간다.
결국 여인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퇴출을 종용하는 스승 정약용에게 그녀는 주저 없이 묻는다. "계집에겐 관헌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헌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쭈욱 만들어 왔는데 말입니다." 정약용은 말문이 막힌다.
그 역시 남자였기에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의 모습을 그녀를 통해 보게 된다. 백성은 아파하고 피를 흘려도 지배층은 편안하고 느긋할 뿐인 사회구조 그리고 자신들의 자리보전 외에는 관심 없는 지배층의 속성을. 200여 년 전 역사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지만 오늘날 이 땅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것도 그 만큼 정의의 실종을 반증하는 것이었을 게다. 허나 어디 정의뿐이겠는가? 도덕은 어디 있으며, 또 공정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가?.
해서 모든 도덕 윤리 등이 엉망으로 되어가는 이 암울한 사회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기 빠듯하고,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내일은 나아지겠지'하는 기대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점점 나락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처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커져가는 현실을 돌아다보게 된다.
그럼에도 나랏님은 공정사회란 '출발과 과정에 있어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남의 말하듯 한다. 정말 그럴까?
듣기에 따라선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기회를 제공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금권계급이고 그들이 사회를 양분하는 구조 속에서 이들과 다른 계층은 무력하기만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벌고 권력을 사고 명예도 얻는 사회, 수단이 좋은 사람, 뒷줄이 든든한 사람, 돈 있는 사람들만이 행세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법대로는 살아갈 수 없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에서 금권과 이들의 동아줄로 군림하는 지배층이 단죄되지 않는 사회가 공정할 수 있을까?
해서 우리는 하버드대학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 교수가 말한 '공정사회란 마이너리티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회'라는 지적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정약용은 다시 그녀에게 대답한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詩)가 아니다 (不傷時憤俗非詩也)'. 다시 말해 '제 아무리 백성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없다면 그 관헌은 유죄다'라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 말대로 '공정의 반대말은 불공정이 아니고 권력'인 것이다. 그렇다. 오늘의 모든 관리들과 지배층은 모두 유죄다.
2019-04-16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