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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의 世上萬事

치과의

  • 시어머니와 며느리

    구약성서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은 누구일까. 아담의 아내 이브다.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약성서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은 요셉의 아내 마리아다. 며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부간의 갈등을 빗댄 우스갯소리지만 부끄러운 한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딸의 손에는 물이 묻지 않아야 기쁘지만 며느리 손이 깨끗하면 화가 나는 것이 시어머니의 마음이라 한다. 반면에 며느리의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는 항상 잔소리하고 참견하는 못마땅한 상대라고 한다. 시어머니가 미워서 '시'자가 붙은 시금치조차 안 먹는다고 하니 오죽할까. 그래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두 여인의 화합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온 유럽을 통합하는 것이 더 훨씬 쉽다고도 말했는가 보다. 옛날에 한 모자가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를 얻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오랫동안 먼 곳으로 일을 가게 되자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해졌다. 어느 날인가 밥이 잘 되었나 보려고 솥뚜껑을 열고 밥알 두 개를 먹어 보았는데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부엌으로 달려와 '어른보다 먼저 밥을 쳐 먹는다'며 마구 때렸다. 며느리는 병들어 죽었다. 남편이 돌아와 슬피 울며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는데 그 곳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꽃잎은 마치 벌린 입술처럼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두 개의 하얀 밥알 같은 것이 보여 사람들은 이를 며느리 밥풀 꽃이라 불렀다 한다. 남성위주사회에서 여성들은 억눌리고 힘들게 수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오늘의 시어머니들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막차를 탄 격이 되어 버렸다. 며느리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만만치 않은데다가 내 것이라고 여겼던 아들은 샘이 나도록 며느리와 더 가깝다. 결국 자신만 소외된 것 같아 속상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만 그나마 악착같이 버텨보려는 보상심리와 시기가 시어머니들로 하여금 이토록 처량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어찌 본시부터 모든 시어머니들의 마음이 다 그랬으랴. 어쩌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내보인 표현과 방법이 서투르다 보니 그렇게 나온 것이었겠지. 그래서 아랫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의 말이 옳고 윗목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맞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렇게 서로 미움의 골이 깊어지면 그 사이에서 마음 다치는 것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남편뿐. 혼인은 다른 가문의 풍습과 새로 익혀야 하는 분위기로 이주하는 것이다. 한 가문에 다른 성씨의 여자는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고 남자는 사위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서로 융합하고 어울린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새로운 환경과 낯설은 문화의 다른 나라로 이민 오는 것과 같을 게다. 서로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얼굴색이 다르고 살아온 관습과 신앙이 달라도 시집가고 장가들 듯 새 터전의 말을 배우고 익히면서 법과 질서에 따라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고유의 풍습을 잃지 않고 지키며 긍지도 갖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나라를 존중하고 이 나라는 우리를 구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합중국처럼 합심가정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선 미국이 야속해지면 '미'자가 들어간 '미움'을 버리고 시어머니가 미워지면 '시'자가 들어 있는 '시기'를 서로 버려보자. 그리고 예쁜 며느리의‘며’자가 들어간‘면담’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지지 않을까?


  • '돼지' 타령

    돼지 열두 마리가 소풍을 갔다. 개울을 건너게 되자 혹시나 물에 빠진 녀석은 없는지 보려고 대장 돼지가 점검을 한다. "하나 둘... 어? 열한 마리밖에 안 되네. 한 마리가 부족하다" 다른 돼지가 나와 다시 세어 봐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신을 빼고 세었기 때문이란 걸 알 리 없는 돼지들. 계속 세었지만 마찬가지. 이 때 좀 똑똑한 돼지가 나와서 "대장 돼지를 안 세었으니까 그렇지"하고는 '대장부터 하나'하면서 세어 나간다. 그래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기를 또 빼먹은 것이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그나마 제일 영리하다는 돼지가 나섰다. "대장과 너를 안 세었으니 그렇지. 그러니 둘을 미리 빼고 나면 열 마리가 되겠지? 하고는 다시 세었는데, 어라? 열한 마리다. 오히려 한 마리가 더 있으니 없어진 게 아니고 아무래도 여우가 변장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러 끼어든 게 아닐까? 그것부터 잡아야겠다"면서 해가 저물도록 엉뚱한 일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한 학생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생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려고 했다. 때마침 차안의 라디오 음악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빠바바 방-'하고 힘차게 들려왔다. '때는 이때다'싶어 힘차게 실례를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했는데 모든 이가 찡그린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더란다. 웬일인가 싶어 보았더니 '아차!'들려 온 음악은 자기머리에 낀 헤드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거야 그냥 웃어버리면 끝나는 일. 그러나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나만은 예외라고 빼고 모든 피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나 그것도 모자라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까지 하는 비행들이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슬퍼하지 말자. 반대로 우리 이웃 중에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몫을 빼는 이들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희생 정신으로 남에게 이로움을 주려는 숭고함이 그나마 병든 사회를 치유하며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민간설화에 보면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주인이 물었다. 그러자 돼지는 개나 소, 닭 등은 주인을 위해 하나같이 좋은 일을 했지만 자기는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 게 미안해서 "저는 주인을 위해 한일이 없으니 앞으로 주인을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제물이 되겠습니다"했더란다. 그래서 돼지는 재산이나 복을 주는 집안의 재신(財神)으로 상징이 되었다는데 그러고 보면 돼지를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로 현금을 '돈'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어디 그것뿐인가? 돼지는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어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으로 고사상 위에도 그 머리를 제일 먼저 올리고 두 손 모아 빈다. 그리곤 돼지를 '도야지'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어쩌면 '…되야지'하는 소망과 '…되지'하는 믿음과도 연결고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돼지는 나만이 아닌 공동의 선을 이루어 감을 가르쳐 주고 풍요와 다산을 쌓아갈 수 있게 도와주며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는 멘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경찰이 사람 대신 돼지를 차에 태워 호수에 수장하는 실험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돼지는 사람 피부와 비슷해서 물속에서 부패하는 과정을 알아내 미해결로 남는 많은 익사 사고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과학수사기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란다. 이제 돼지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도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 "우리 아빠는 사과장수"

    근래에 한국에선 로스쿨 응시할 때 부모의 직업을 써 넣는 것 때문에 말썽을 빚고 있는가 보다. 현대판 음서제니 신판 금권에 의한 차별이니 말이 많다. 허나 부모의 직업을 밝히는 건 새로운 게 아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이 무척 가난했던 시절, 초중고 학교에서 써내라는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게 있었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조사해서 무엇 하겠다는 거였는지 흑백텔레비전조차 거의 없던 시절에 TV가 있는지 라디오가 있는지 또 무슨 신문을 구독하는 지는 물론 온 집안의 내용을 다 써야 했다. 그 것 뿐 아니다. 식구들 이름과 학력 직업 등 인적사항도 몽땅 적는데 아버지의 직업 또한 빠지지 않았다. 가슴에 열쇠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 초등학교 문 앞이나 뒷문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국자에 설탕을 녹여 각종모양을 만들어 팔던 아저씨들이 있었다. 우린 그들을 열쇠장사와 또 뽑기 장사라 불렀지만 정작 본인들은 도난방지 주식회사와 제당업자라고 불렀다는 우스개소리가 그것이다. 허나 정말 웃어버릴 만은 아닌 일이 벌어졌다. 인천의 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아이가 아버지의 직업란에 '사과장수'라 썼다. 그 후 그 아이는 담임의 눈에서 벗어나 교실 가장자리에 앉아야했고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 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이의 아버지가 사과를 파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선생님이 생각한 그런 장사가 아니라 경기도에서 제일 큰 사과도매업을 하는 큰 부자였던 거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생님은 아이의 자리를 부랴부랴 앞으로 옮겨주는 등 하루아침에 대우가 달라졌다는 씁쓸한 해프닝이었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직업을 그리고 이름보다도 그의 직함을 더 중시하는 문화관습에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면 집사가 붙어야하고 동네에서도 사장님 정도는 붙어야 살맛이 난다. 그렇지 못하면 기분이 상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사소한 시비의 70%가 상대에 대한 호칭문제에서 시작 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 어려울 때가 많은 걸 동감 할 것이다. 좀 비약해서 말하면 상대와의 초전 탐색전에서 기선제압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아주 부인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의식구조가 우리와 다른 서구는 별 문제가 없어 비교적 간단하다. 허나 우리만큼 심각하지는 않아도 그들에서도 비슷한 예는 있다. 바텐더는 '믹솔러지스트'라고 한단다. 섞는다는 '믹스(mix)'에 학문을 뜻하는 '-올로지(-ology)'붙인 단어다. 어딘가 모르게 고학력 냄새가 묻어나기 때문일 게다. 허나 서구는 주로 개인적인 직업이나 우열문제보다는 인권차별에 따른 사회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춘다.'핸디캡'을 'disabled'로 바꾸는 것 등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이러한 호칭을 바꾸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청소부'는 '환경미화원'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단어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사고자세와 의식의 변화일 게다. 차별의식이 아니라 남이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할 줄 아는 구별의식 말이다. 언어와 사고는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호칭 하나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차별의식이나 낙인으로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손상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디바와 '양복쟁이 탐'

    그리이스 신화에 '시지프스'이야기가 나온다. 호머는 그가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신들은 그가 엿보기를 좋아하고 입이 싸서 신들이 하는 일들을 폭로한다고 미워했다. 하루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서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것을 몰래 훔쳐보고는 그의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완전히 제우스 눈 밖에 나서 저승사자 신에게 그를 잡아 처리하라 명령했다. 허지만 이를 미리 알아챈 그가 오히려 저승사자 신을 묶어 가두어 죽이자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일이 이쯤 되자 몹시 화가 난 죽음의 왕 하데스가 시지프스에게 벌을 내렸다. 커다란 바위를 높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놓으라고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꼭대기에 당도하면 돌은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진다. 다시 밀어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지고. 영원히 바위와 씨름을 해야만 하는 참혹한 형벌이었다. 헌데 이런 엿보기의 형벌이 인간세계에서도 일어났다. 옛날 영국의 코벤트리 마을에 심술 고약한 영주가 있어서 주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부인이 앞장서서 제발 세금을 적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귀찮아진 남편은 빈말로 부인이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차마 정숙한 부인이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알몸으로 마을을 돌기로 했다. 이 사실이 온 마을에 퍼지자 마을사람 모두는 그녀의 사랑과 용기에 감복한 나머지 그 날만은 모두 창문을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하였다. 헌데 양복쟁이 탐이 몰래 커튼 사이로 부인의 알몸을 엿보려 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 버렸다. 이때부터 '피핑 탐'은 몰래 엿보는 이를 빈정거리는 말이 되었다. 근자에는 전 세계가 불법도청으로 온통 시끄럽다. '피핑 시지프스'당국들이 된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은 책 '투명사회'에서 정보사회의 부작용으로 모든 것이 너무 들여다보이는, 그래서 프라이버시가 없는 '알몸사회'가 되었다고 고발했다. 투명사회라는 제목만으로는 얼핏 맑은 사회를 연상시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피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방을 한 쪽에서만 볼 수 있는 일방통행 투시장면과 같은 바로 그런 걸 말한다. 남의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심리나 탐내는 욕심이 바로 범죄의 시작이다. 해서 십계명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했거늘. 이는 우리가 남의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정보매체가 우리사회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즘에는 더욱 그러할 뿐 아니라 이를 책임 있게 사용할 의무도 뒤따른다는 말이다. 진실은 무섭도록 정직하여 간사함을 허용치 않아 사필귀정으로 돌아간다 해도 결국 피해자가 겪어야하는 치명적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용서가 모든 것을 다 잊도록 해 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알몸을 훔쳐보려했던 탐은 눈을 잃었다. 그러나 알몸도 마다했던 영주의 아내 고디바는 오늘날 초코렛의 이름으로 남아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 진시황과 김정은

    2000여 년 전 중국 진나라 상인 중에 여불위라는 야망이 큰 대부호가 있었다.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들의 모임에 갔다. 헌데 제 아무리 엄청난 재력가라 해도 장사꾼이라는 이유로 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재물로는 실질적 권력을 탐닉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만의 왕을 만들어 권세를 잡을 엄청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는 인근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는 자초 왕자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비록 그의 서열이 별 볼일 없을 정도로 한참 밀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불위는 그를 점찍고 전 재산을 건 말하자면 일생 최대의 도박을 한다. 본국의 큰 황후에게 인심을 사는데 재물을 아끼지 않고 로비를 하는 등 치밀한 공작을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천운의 기회는 오고 드디어 자초왕자는 본국에 돌아와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일찍이 자초왕자에게 바친 자신의 애첩으로부터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는 실상 여부위의 씨앗이었다. 이 아이가 후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호(胡)를 조심하라'는 누군가의 점궤를 믿고 변방의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위업을 이루었으나 정작 그 호(胡)의 의미는 오랑캐 시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호해(胡亥)왕자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형가라는 불세출 검객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 곁에 있던 한 시녀의 기지로 구사일생한 진시황은 그녀를 후궁으로 삼아 태어난 아이가 호해였다. 헌데 진시황이 지방순시에서 돌아오다 객사하자 이 호해가 환관 조고의 모략에 빠져 황제에 올랐다가 결국엔 나라를 말아먹게 되니 그 점궤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암튼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나라이름을 진(秦)이라 하고는 고대 중국 시조인 3황5제의 두 글자를 모두 합쳐 '황제'라 했으니 이로써 '진나라에서 처음으로 황제가 시작한다'하여 진시황이라 불렀다. 자신을 천하제일의 위치로 격상하고 그 누구보다도 높다는 것을 뽐내고 싶었던 거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짐'이라하고 그 어느 누구도 못쓰게 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이를 본떴는지 '태양왕'도 모자라 '짐이 곧 국가다'라며 위세를 떨었다. 최근 북한에선 당 대회가 열려 자칭 대관식을 한 김정은도 자신의 직책을 새로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영원한 주석으로 하고 아버지를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고는 이 단어를 아무도 못쓰게 영구 결번으로 만들더니 자신은 당 위원장이라 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직책은 없다. 위원회 위원장이면 몰라도 그냥 당 위원장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희한한 이름의 완장을 찼다. 총서기나 서기장은 중국과 러시아의 것이니 만큼 주체를 내세운 그가 찾을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 게다. 더 꼴불견은 그의 연설이 끝나자 12번의 '만세'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만세 3창도 아니고 만세 12창이라니 아무리 신격화라 해도 좀 심하지 않나? 그러니 김정은은 이제 더 나아가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고 싶을까 궁금해진다. 누구처럼 '짐이 곧 공화국이다'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 또한 자존심 때문에 어쩌면 또 다른 단어를 만들어 낼는지도 모를 일. 갈수록 태산. 점입가경이다.


  • 흙수저들의 반란

    만년 꼴찌 후보로 소문났던 잉글랜드 프로축구팀의 기적적인 감동 스토리에 전 세계 축구팬이 흥분하고 있다. '흙수저'클럽 레스터 시티가 창단 132년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며 거짓말 같은 동화를 만들어낸 일이다. 인구 30 만여 명의 조그마한 소도시 레스터 시티 지역 연고팀으로 창단 이래 하위에서만 전전했던 팀이었다. 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1군에 기용되지 못해 퇴출된 선수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1경기당 불과 40 여 달러를 받고 뛰던 선수 등 주전멤버 11명 몸값이 유명 수퍼스타 한 명의 몸값에도 못 미쳤다. 게다가 지난 해 이탈리아 출신 라니에리 감독이 이 팀의 사령탑에 선임되자 '우승과 거리가 먼 감독'이라든가 '루저'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스포츠 도박사들은 우승 확률을 5000 대 1 로 보았다. 우승한다는 게 거의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헌데 그런 레스터 시티가 맨시티, 아스날, 맨유, 리버풀, 첼시 등 '빅5'나 토트넘 핫스퍼 같은 신흥 강호를 넘어 우승컵을 들어 올리자 '꼴찌 중 꼴찌의 반란'이라고 난리다. 이런 레스터 시티의 기적 같은 우승이 하도 믿기지 않다 보니 신비로운 이야기들까지 퍼졌다. 그 중 하나가 1485년 장미전쟁의 와중에서 전사한 리처드 3세 덕분이란 얘기다. 리처드 3세는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우리에겐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에서 형과 조카를 살해한 포악한 왕 또는 꼽추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485년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며 전사했다. 그 후 레스터 시 수도원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무덤의 행방을 530년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레스터 시의 한 주차장에서 유골이 우연히 발견됐는데 DNA 검사를 해보니 리처드 3세였다.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룬 후 레스터 성당에 묻고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추모시를 낭송했다. 그러자 이 때부터 우연인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레스터 시티가 7승1무1패의 성적으로 1부 리그에 올랐고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을 때까지 45전29승의 경이로운 성적을 거뒀다. 사람들은 구천을 헤매던 리처드 3세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준 레스터 시민들을 위해 우승컵을 안겨줬다고 이야기 한다. 이를 두고 LA타임즈가 "530년 만에 잠든 리처드 3세가 국왕의 기운을 전해줬다"고 하는 등 많은 언론과 유명인사의 극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레스터 시티 성공 신화에서 땀과 눈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공을 차고, 잠을 자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던 선수에게 감독이 슈팅훈련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였다니 눈물겨운 흙수저들의 반란 그리고 루저의 역전이 어찌 그냥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승리 후 라니에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축구에서건, 삶의 모든 영역에서건 스스로를 믿고, 시도해보라는 것"이라고.


  • 팥죽 한 그릇과 100세 인생

    구약 성서 창세기 25장에 보면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그의 장자권을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이었다. 남성적이고 사냥을 좋아하는 마초 맨 형 에서에 비해 동생 야곱은 여성적이고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서 사는 마마보이였다. 그런 야곱이 엄마와 공모하여 형을 밀어내고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형으로 빼앗는 음모를 꾸민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에서 지치고 너무 허기져 돌아왔는데 야곱은 미리 끓여놓은 팥죽 한 그릇을 주는 댓가로 장자권을 넘겨 달라고 한다. 에서는 배고픈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그러라고 하고는 팥죽을 먹는다. 그 후 야곱은 형이 없는 틈을 타 에서처럼 꾸며 앞을 잘 못 보는 아버지에게서 형에게 돌아갈 모든 축복을 가로챈다. 그리고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외삼촌한테 속아 21년이란 긴 세월동안을 일해주고 나서야 언니 레아와 함께 동생 라헬 모두를 아내로 얻은 후 그 동안 불린 많은 재산을 갖고 형에게로 돌아와 용서를 받는다. 40여 년 전인가. 영화 '왕과 나'가 있었다. 과학을 존중하고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리기 위해 애쓰는 샴국의 왕과 영국으로부터 초빙되어 온 왕가의 영어 가정교사와의 이야기다. 어느 한 새벽에 왕은 여선생을 부른다. 그리곤 성서를 들이대곤 모세는 참으로 어리석고 비과학적인 인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어떻게 이 세상을 엿새 만에 창조했다고 믿고 성서를 그렇게 기록했냐는 것이었다. 선생은 왕께 대답한다."폐하, 성서는 과학자의 마음으로 써진 책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쓰인 책입니다." 성서는 과학이나 역사의 시각으로 써진 것이 아니라 신앙의 면으로 쓰여 진 것이므로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해석을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신앙의 책을 분석하기는 어렵겠지만 조지아 의과대학의 성서를 연구하는 한 내과교수가 성서의 많은 인물에 대해 진단과 평가를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에서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분석은 당시 장자권은 생명만큼이나 중요 한 것이었는데 에서는 어찌하여 팥죽 한 그릇에 그리 쉽게도 그의 권리를 포기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에서는 '내가 죽는 마당에'라며 야곱으로부터 팥죽 한 그릇을 얻어 마시자마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죽을 듯이 쓰러질 지경에 이른 그가 먹은 당분 섭취에 빠른 회복력을 보였다는 점 외에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한 결과 에서는 저혈당 당뇨병이었을 거라고 진단했다. 인간의 현대적 질병도 이미 오래 전 시작됐음이다. 성서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 이전에 인간은 상당한 장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추악한 탐욕 때문에 모든 하늘의 창이 열려 물이 쏟아지고 삼백여 일의 대홍수가 나서 지상의 모든 것은 멸하여지는 벌을 받고 그 때 부터 인간의 수명은 120살로 한정 지워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는 잘못된 생활버릇과 그릇된 섭생관습으로 그나마도 다 누리지를 못하고 있음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는지.


  •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로얄 살루트'하면 애주가들은 금방 위스키를 떠올릴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스카치위스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어렸을 때 21년 후에 있을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21발의 예포를 울리고 사용하였다하여 '로얄 살루트'라고 이름 붙였진 위스키다. 대관식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치러지는 데 켄터베리 대주교의 시작기도 후 선서를 하고 의자에 앉으면 성유를 바르고 보검과 십자가가 붙은 왕홀을 왼손에 받고 비둘기 장식이 있는 왕장을 오른손에 받는다. 1952년 즉위해 올해로 90세가 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6월 12일 대규모 파티가 열린다는 보도가 화제다. 이로써 여왕은 영국을 변두리 나라에서 최강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한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최장기 재위 군주가 됐다. 애당초 여왕은 아버지가 윈저왕가의 차남이어서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큰 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미국여성 심프슨과 결혼한다며 왕위를 포기하면서 동생 앨버트가 조지 6세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얼마 후 타계하는 바람에 해외순방 중이던 엘리자베스 공주가 귀국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됐다. 아버지 조지 6세는 말더듬 증으로 대인기피증이 있었으나 이를 어렵게 극복하고 감동적인 대 국민연설을 해냄으로써 국민 정신력을 단합시켜 2차 대전 당시 위기의 영국을 구해낼 수 있었던 모습은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잘 묘사돼 있다. 헌데 대관식 의자는 운명의 돌이라 불리는 대관석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야곱의 베개라고도 한다.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오르내리는 사다리 꿈을 꾼 연유로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의 의미가 부여된 것은 왕은 하늘이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나라 임금들은 즉위식 때 '면류관'을 썼다. 관의 옆면에 붙어있는 '면'은 귀를 막기 위한 것이고 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류'는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 한다. 임금은 가까이서 보다는 들리지 않는 먼 곳의 깊은 소리까지도 듣고 보이지 않는 곳의 어두운 아픔까지도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겠다. 그런 면에서 여왕은 이를 손수 실천하는 지도자였다. 여왕 통치 동안 여러 연방 국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거나 왕실 안에서도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시련과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여왕을 향한 영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것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 국민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며 조용히 봉사하는 통치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가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는 막강한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면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흥망을 모두 겪은 시대의 통치자였으며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자세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군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영국 국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신이시여 우리의 자비로운 여왕을 구원하소서!' 여왕의 건강과 장수를 빈다.


  • '천국 전화'

    어느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 막 앉았는데 바로 옆 칸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누군지 모르지만 얼떨결에 '네, 안녕하세요.'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요새 어떻게 지내요?'하며 되물어온다. 좀 당혹스럽고 난처하다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저 그래요. 헌데 그쪽은요.'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전화 끊어야겠어요. 옆에 어느 멍청이가 말끝마다 끼어드네요. 다시 걸죠.' 셀 폰이 발달한 요즈음 일어난 해프닝이다. 셀 폰은 이제 일상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휴대품이 되었다. 그러나 길을 건너가면서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어 운전자들을 불안하게 하는가하면 가족과의 식사 중에도 들여다보는 아이들도 있고 심지어 데이트 하는 연인들도 식당에 마주 앉으면 텍스트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하니 이건 단순히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담화하며 식사를 즐기는 식당을 비롯하여 공공장소에서도 주위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마구 큰 소리로 떠드는 몰염치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처럼의 기분을 망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극장이나 세미나 혹은 교회에서도 울려대는 벨소리들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기도 한다. 허나 이것 말고도 또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넘쳐나는 음성이나 문자 정크메일이다. 음성, 문자메일은 기계와의 대화로 인간미를 상실해 가는 아쉬움이 있긴 해도 여러 가지 많은 양의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훌륭한 심부름꾼일 뿐만 아니라 메일에 남겨진 메시지를 통해 나중에 시간 날 때 처리 할 수 있다는 점 등의 편리함이 있다. 그럼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원치 않는 메시지나 상업적인 메일들은 우리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고 짜증을 나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공해 내지는 폭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바쁜 현대 사회 생활 속에서 전자매체는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으니 이를 철저히 외면 할 수도 없게 됐다. 이 지경이니 이젠 우리의 삶을 넘어 하늘에 까지도 전염됐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게 아니겠나. 하늘에 전화를 걸면 '천국에 전화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영어로는 1번, 스패니쉬로는 2번, 그 외 언어는 3번을 누르세요.'라는 음성메시지가 나온단다. 이어 '감사는 1번, 불만은 2번, 질문이나 그 외의 것은 3번을 누르세요.'한단다. 그리고는 '지금은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이 다른 죄인들을 돕느라 바쁩니다. 기다려 주시면 받은 순서대로 답해드립니다. 만일 하느님께 용무가 있으면 1번, 예수님께는 2번, 성령께는 3번을 누르세요. 천국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5번과 그의 소셜 시큐리티 번호를 누른 후 #를 누르세요. 없다는 신호가 나면 끊고 666번 (지옥)을 누르세요. 그리고 천국에 예약하려면 '5646(요한)'을 누르고 316 (3장16절)번호를 입력하세요. 끝으로 이곳 업무 시간 외에 비상도움이 필요하면 각 구역의 사제나 목사에게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천국 전화번호는 66-3927과 73-4627입니다.'(개신교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27권으로 모두 66권이고 가톨릭은 구약 7권이 더 많은 73권이다.) 정말 이럴지 누가 알랴!


  • '워싱턴 닷컴(DC) 만세!'

    미국이 독립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라이름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생겼다. 한 의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먼 동방의 나라 조선에 가면 세종대왕이라는 분이 글을 만드는 데 천재라고 하니 자문을 구해 보자고 했다. 사절을 만난 세종은 '아무렇게나 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메리카'가 되었다. 미국 윗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아쉽다하고 사신을 보냈더니 대왕께서 이르시길 '너흰 가나다순으로 해라'하시거늘 '카나다'가 됐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우스갯소리지만 미국만이 아메리카는 아니다. 멕시코에 가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메리칸 이라고 한다. 북미, 중미, 남미, 모두 아메리칸 임엔 틀림이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아메리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US아메리카임을 모두 안다. 그러니 모든 아메리카 대륙인들의 기분이 몹시 언짢을 터다. 그럼에도 미국은 마치 자신들만의 점유물인양 아메리카라고 한다. 건국초기에 콜럼비아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긴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남미의 콜롬비아가 생기면서 그 잔여만 남는 결과가 되었다는데. 어쨌거나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아 그 이름 여기저기 자취를 남겼으니 가장 유명한 것이 아무래도 워싱턴 DC가 아니겠는가. DC는 '컬럼비아 자치구'란 뜻인데 그건 장학퀴즈 식 정답이고 사실은 200여 년 후에 IT산업으로 세계를 휘어잡을 Dot Com이 아니었던가 싶다. '워싱턴 닷컴(DC)!' 다른 나라들은 모두 웹주소 뒤에 각자나라이름을 붙이게 하고는 자기네만 깔끔하게 .com으로 처리하고 그 거드름 피는 모습이란 얄밉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이미 그 오래 전에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는지 아니면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수도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초강국 미국이 마음속 깊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건 역사적 문화적 전설의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신화의 결여. 세계의 모든 나라에는 나름대로의 이러쿵 저러쿵 신화가 있다. 이는 조상전래의 공동유산으로 한 집단을 묶어주는 접착제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 연결해주는 고리라 말할 수 있는데 미국은 이러한 신화가 없다. 유구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미국은 조부들로부터 시작해 오늘까지도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토착민 부족을 섬멸하는 잔혹한 정복도 개척과 구호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양면성의 틀을 가진다. 그러고 보니 잔혹성(Devil)과 인류애(Christianity)의 두 가지 의미가 바로 DC인 셈이다. 아무튼 이제 세계의 중심에 서있는 미국은 바로 워싱턴DC에서 잔혹한 전쟁(D)과 구호(C)로 모든 나라에 큰 형님 역할에 바쁜 한편 Dot Com 으로도 글로벌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건국조부들의 비전이든 야망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인데… 이제 더 나아가 앞으론 디지털(D)과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섭(C)의 시대로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워싱턴 Dot Com 만세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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