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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의 世上萬事

치과의

  • '예의염치' 

       어쩐 일인지 한국 사회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것도 이름 없는 국민이 아니라 내놓으라는 소위 지도자격이라는 사람들로 말이다. 세계적 대기업을 부도나게 하는 와중에도 알짜 계열회사는 몽땅 챙기는 것도 모자라 사재만 400 억대이면서도 10억 원의 손실을 피하겠다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보유 주식을 매각한 회장님. 그리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가정주부여서 회사운영을 잘 몰랐다나? 또 친구 사업가 등치는 것도 모자라 협박과 음해까지 서슴없이 한 유력 정치인의 사위라는 동네 양아치만도 못한 부장검사님.  


  •   리더와 보스

    김학천 치과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녀 8명이 있는데 그 중에 두 아이는 앞을 못보고 세 아이는 귀머거리이고 한 아이는 정신박약아였다. 그러한 그녀가 또 다시 임신을 했는데 매독까지 걸려 태중의 아이를 과연 낳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 거짓말

    김학천/치과의      한국의 다음소프트가 지난 3년 간 인터넷에 올라온 글 수억 건을 분석해보니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이 '남편'이었다고 한다. 


  • 중독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 기도부터 하는 사람, 커피 한잔 마시는 사람, 혹은 담배부터 한대 무는 사람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하루 시작뿐만 아니라 누구나 습관은 갖고 있다. 좋은 습관일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게다. 습관은 어찌 보면 일종의 중독성이랄 수도 있다. 고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보통 중독이라고 하면 약물을 떠올린다. 내 환자들 중에서도 치료와 더불어 반드시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닌 데도 처방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강한 진통제 안에는 마약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약을 복용하면 묘한 기분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이를 즐기고 싶어 그럴 게다. 허나 중독은 약물뿐만이 아니다. 오래 전 후배 병원에 방문 차 들렀다가 잠깐 기다리는 동안에 본 잡지에 화이트맨이라는 작가가 쓴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왜 지적인 여자가 폭력적인 남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능력 있는 여자가 무능력한 남자에게서 헤어나질 못하는가?'하는 등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제시한 글이었다. 마침 그 때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화제가 되면서 힐러리가 화를 참으며 살아가는 이유가 그에 대한 강한 중독으로 빠져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기사들이 여기저기 나왔을 때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랑에 중독되어 매여 있는 강박관념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를테면 사랑 중독이란 말이다. 그러면서 누군가 쇼핑을 하다 그 자리에서 죽으면 행복할 것 같다던 말이 떠올랐다. 이쯤 되면 쇼핑 중독자일 게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겠다고 수긍이 간 것은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지에 대한 중독증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곧 그의 삶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서다. 죽을 만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깊이 빠졌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하지만 중독에는 목숨을 걸만큼 매혹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랑하는 이들까지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무서움도 감춰져 있기에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독이 반드시 다 나쁜 것만은 아닐 게다. 드라마 '허 준'에서처럼 극약처방은 독이 반대로 해독작용도 하는 또 다른 이면을 갖고 있다는 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인생이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라는 수학 공식의 셈보다 정답 찾기가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말함이다. 사랑의 방정식 또한 이와 같아서 '하나 더하기 하나'가 제로도 되고 열도 될 수 있으니 무엇에 중독되어 사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중독증이 병을 줄 수 있지만 삶의 힘도 되어주니 정말 병 주고 약 주기가 아닌가? 마치 산을 끔찍이 좋아했던 사람은 그 산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가 하면 술이나 담배를 좋아했던 이들이 그것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헤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데도 그 즐김의 대가에 대한 경고를 못들은 척 하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는지. 그렇지만 유혹에 빠져 스스로 갇히는 파멸의 중독보다는 기왕이면 더불어 사는 사람들끼리 베풀고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에 중독된다면 어지러운 사회를 해독시키는 귀한 약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득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미천한 감정을 일으키는 음악을 들은 사람은 그 성격도 미천해 진다.'


  • 시어머니와 며느리

    구약성서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은 누구일까. 아담의 아내 이브다.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약성서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은 요셉의 아내 마리아다. 며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부간의 갈등을 빗댄 우스갯소리지만 부끄러운 한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딸의 손에는 물이 묻지 않아야 기쁘지만 며느리 손이 깨끗하면 화가 나는 것이 시어머니의 마음이라 한다. 반면에 며느리의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는 항상 잔소리하고 참견하는 못마땅한 상대라고 한다. 시어머니가 미워서 '시'자가 붙은 시금치조차 안 먹는다고 하니 오죽할까. 그래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두 여인의 화합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온 유럽을 통합하는 것이 더 훨씬 쉽다고도 말했는가 보다. 옛날에 한 모자가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를 얻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오랫동안 먼 곳으로 일을 가게 되자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해졌다. 어느 날인가 밥이 잘 되었나 보려고 솥뚜껑을 열고 밥알 두 개를 먹어 보았는데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부엌으로 달려와 '어른보다 먼저 밥을 쳐 먹는다'며 마구 때렸다. 며느리는 병들어 죽었다. 남편이 돌아와 슬피 울며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는데 그 곳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꽃잎은 마치 벌린 입술처럼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두 개의 하얀 밥알 같은 것이 보여 사람들은 이를 며느리 밥풀 꽃이라 불렀다 한다. 남성위주사회에서 여성들은 억눌리고 힘들게 수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오늘의 시어머니들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막차를 탄 격이 되어 버렸다. 며느리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만만치 않은데다가 내 것이라고 여겼던 아들은 샘이 나도록 며느리와 더 가깝다. 결국 자신만 소외된 것 같아 속상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만 그나마 악착같이 버텨보려는 보상심리와 시기가 시어머니들로 하여금 이토록 처량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어찌 본시부터 모든 시어머니들의 마음이 다 그랬으랴. 어쩌면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내보인 표현과 방법이 서투르다 보니 그렇게 나온 것이었겠지. 그래서 아랫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의 말이 옳고 윗목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맞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렇게 서로 미움의 골이 깊어지면 그 사이에서 마음 다치는 것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남편뿐. 혼인은 다른 가문의 풍습과 새로 익혀야 하는 분위기로 이주하는 것이다. 한 가문에 다른 성씨의 여자는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고 남자는 사위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서로 융합하고 어울린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새로운 환경과 낯설은 문화의 다른 나라로 이민 오는 것과 같을 게다. 서로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얼굴색이 다르고 살아온 관습과 신앙이 달라도 시집가고 장가들 듯 새 터전의 말을 배우고 익히면서 법과 질서에 따라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고유의 풍습을 잃지 않고 지키며 긍지도 갖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나라를 존중하고 이 나라는 우리를 구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합중국처럼 합심가정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선 미국이 야속해지면 '미'자가 들어간 '미움'을 버리고 시어머니가 미워지면 '시'자가 들어 있는 '시기'를 서로 버려보자. 그리고 예쁜 며느리의‘며’자가 들어간‘면담’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지지 않을까?


  • '돼지' 타령

    돼지 열두 마리가 소풍을 갔다. 개울을 건너게 되자 혹시나 물에 빠진 녀석은 없는지 보려고 대장 돼지가 점검을 한다. "하나 둘... 어? 열한 마리밖에 안 되네. 한 마리가 부족하다" 다른 돼지가 나와 다시 세어 봐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신을 빼고 세었기 때문이란 걸 알 리 없는 돼지들. 계속 세었지만 마찬가지. 이 때 좀 똑똑한 돼지가 나와서 "대장 돼지를 안 세었으니까 그렇지"하고는 '대장부터 하나'하면서 세어 나간다. 그래도 역시 열 한 마리뿐이다. 자기를 또 빼먹은 것이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그나마 제일 영리하다는 돼지가 나섰다. "대장과 너를 안 세었으니 그렇지. 그러니 둘을 미리 빼고 나면 열 마리가 되겠지? 하고는 다시 세었는데, 어라? 열한 마리다. 오히려 한 마리가 더 있으니 없어진 게 아니고 아무래도 여우가 변장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러 끼어든 게 아닐까? 그것부터 잡아야겠다"면서 해가 저물도록 엉뚱한 일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한 학생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생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려고 했다. 때마침 차안의 라디오 음악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빠바바 방-'하고 힘차게 들려왔다. '때는 이때다'싶어 힘차게 실례를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했는데 모든 이가 찡그린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더란다. 웬일인가 싶어 보았더니 '아차!'들려 온 음악은 자기머리에 낀 헤드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거야 그냥 웃어버리면 끝나는 일. 그러나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나만은 예외라고 빼고 모든 피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나 그것도 모자라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까지 하는 비행들이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슬퍼하지 말자. 반대로 우리 이웃 중에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몫을 빼는 이들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희생 정신으로 남에게 이로움을 주려는 숭고함이 그나마 병든 사회를 치유하며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민간설화에 보면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주인이 물었다. 그러자 돼지는 개나 소, 닭 등은 주인을 위해 하나같이 좋은 일을 했지만 자기는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 게 미안해서 "저는 주인을 위해 한일이 없으니 앞으로 주인을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제물이 되겠습니다"했더란다. 그래서 돼지는 재산이나 복을 주는 집안의 재신(財神)으로 상징이 되었다는데 그러고 보면 돼지를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로 현금을 '돈'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어디 그것뿐인가? 돼지는 신통력을 가진 동물이어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으로 고사상 위에도 그 머리를 제일 먼저 올리고 두 손 모아 빈다. 그리곤 돼지를 '도야지'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어쩌면 '…되야지'하는 소망과 '…되지'하는 믿음과도 연결고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돼지는 나만이 아닌 공동의 선을 이루어 감을 가르쳐 주고 풍요와 다산을 쌓아갈 수 있게 도와주며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는 멘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경찰이 사람 대신 돼지를 차에 태워 호수에 수장하는 실험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돼지는 사람 피부와 비슷해서 물속에서 부패하는 과정을 알아내 미해결로 남는 많은 익사 사고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과학수사기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란다. 이제 돼지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도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 "우리 아빠는 사과장수"

    근래에 한국에선 로스쿨 응시할 때 부모의 직업을 써 넣는 것 때문에 말썽을 빚고 있는가 보다. 현대판 음서제니 신판 금권에 의한 차별이니 말이 많다. 허나 부모의 직업을 밝히는 건 새로운 게 아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이 무척 가난했던 시절, 초중고 학교에서 써내라는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게 있었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조사해서 무엇 하겠다는 거였는지 흑백텔레비전조차 거의 없던 시절에 TV가 있는지 라디오가 있는지 또 무슨 신문을 구독하는 지는 물론 온 집안의 내용을 다 써야 했다. 그 것 뿐 아니다. 식구들 이름과 학력 직업 등 인적사항도 몽땅 적는데 아버지의 직업 또한 빠지지 않았다. 가슴에 열쇠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 초등학교 문 앞이나 뒷문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국자에 설탕을 녹여 각종모양을 만들어 팔던 아저씨들이 있었다. 우린 그들을 열쇠장사와 또 뽑기 장사라 불렀지만 정작 본인들은 도난방지 주식회사와 제당업자라고 불렀다는 우스개소리가 그것이다. 허나 정말 웃어버릴 만은 아닌 일이 벌어졌다. 인천의 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아이가 아버지의 직업란에 '사과장수'라 썼다. 그 후 그 아이는 담임의 눈에서 벗어나 교실 가장자리에 앉아야했고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 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이의 아버지가 사과를 파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선생님이 생각한 그런 장사가 아니라 경기도에서 제일 큰 사과도매업을 하는 큰 부자였던 거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생님은 아이의 자리를 부랴부랴 앞으로 옮겨주는 등 하루아침에 대우가 달라졌다는 씁쓸한 해프닝이었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직업을 그리고 이름보다도 그의 직함을 더 중시하는 문화관습에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면 집사가 붙어야하고 동네에서도 사장님 정도는 붙어야 살맛이 난다. 그렇지 못하면 기분이 상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사소한 시비의 70%가 상대에 대한 호칭문제에서 시작 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 어려울 때가 많은 걸 동감 할 것이다. 좀 비약해서 말하면 상대와의 초전 탐색전에서 기선제압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아주 부인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의식구조가 우리와 다른 서구는 별 문제가 없어 비교적 간단하다. 허나 우리만큼 심각하지는 않아도 그들에서도 비슷한 예는 있다. 바텐더는 '믹솔러지스트'라고 한단다. 섞는다는 '믹스(mix)'에 학문을 뜻하는 '-올로지(-ology)'붙인 단어다. 어딘가 모르게 고학력 냄새가 묻어나기 때문일 게다. 허나 서구는 주로 개인적인 직업이나 우열문제보다는 인권차별에 따른 사회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춘다.'핸디캡'을 'disabled'로 바꾸는 것 등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이러한 호칭을 바꾸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청소부'는 '환경미화원'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단어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사고자세와 의식의 변화일 게다. 차별의식이 아니라 남이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할 줄 아는 구별의식 말이다. 언어와 사고는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호칭 하나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차별의식이나 낙인으로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손상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디바와 '양복쟁이 탐'

    그리이스 신화에 '시지프스'이야기가 나온다. 호머는 그가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신들은 그가 엿보기를 좋아하고 입이 싸서 신들이 하는 일들을 폭로한다고 미워했다. 하루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서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것을 몰래 훔쳐보고는 그의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완전히 제우스 눈 밖에 나서 저승사자 신에게 그를 잡아 처리하라 명령했다. 허지만 이를 미리 알아챈 그가 오히려 저승사자 신을 묶어 가두어 죽이자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일이 이쯤 되자 몹시 화가 난 죽음의 왕 하데스가 시지프스에게 벌을 내렸다. 커다란 바위를 높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놓으라고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꼭대기에 당도하면 돌은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진다. 다시 밀어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지고. 영원히 바위와 씨름을 해야만 하는 참혹한 형벌이었다. 헌데 이런 엿보기의 형벌이 인간세계에서도 일어났다. 옛날 영국의 코벤트리 마을에 심술 고약한 영주가 있어서 주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부인이 앞장서서 제발 세금을 적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귀찮아진 남편은 빈말로 부인이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차마 정숙한 부인이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알몸으로 마을을 돌기로 했다. 이 사실이 온 마을에 퍼지자 마을사람 모두는 그녀의 사랑과 용기에 감복한 나머지 그 날만은 모두 창문을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하였다. 헌데 양복쟁이 탐이 몰래 커튼 사이로 부인의 알몸을 엿보려 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 버렸다. 이때부터 '피핑 탐'은 몰래 엿보는 이를 빈정거리는 말이 되었다. 근자에는 전 세계가 불법도청으로 온통 시끄럽다. '피핑 시지프스'당국들이 된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은 책 '투명사회'에서 정보사회의 부작용으로 모든 것이 너무 들여다보이는, 그래서 프라이버시가 없는 '알몸사회'가 되었다고 고발했다. 투명사회라는 제목만으로는 얼핏 맑은 사회를 연상시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피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방을 한 쪽에서만 볼 수 있는 일방통행 투시장면과 같은 바로 그런 걸 말한다. 남의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심리나 탐내는 욕심이 바로 범죄의 시작이다. 해서 십계명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했거늘. 이는 우리가 남의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정보매체가 우리사회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즘에는 더욱 그러할 뿐 아니라 이를 책임 있게 사용할 의무도 뒤따른다는 말이다. 진실은 무섭도록 정직하여 간사함을 허용치 않아 사필귀정으로 돌아간다 해도 결국 피해자가 겪어야하는 치명적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용서가 모든 것을 다 잊도록 해 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알몸을 훔쳐보려했던 탐은 눈을 잃었다. 그러나 알몸도 마다했던 영주의 아내 고디바는 오늘날 초코렛의 이름으로 남아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 진시황과 김정은

    2000여 년 전 중국 진나라 상인 중에 여불위라는 야망이 큰 대부호가 있었다.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들의 모임에 갔다. 헌데 제 아무리 엄청난 재력가라 해도 장사꾼이라는 이유로 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재물로는 실질적 권력을 탐닉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만의 왕을 만들어 권세를 잡을 엄청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는 인근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는 자초 왕자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비록 그의 서열이 별 볼일 없을 정도로 한참 밀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불위는 그를 점찍고 전 재산을 건 말하자면 일생 최대의 도박을 한다. 본국의 큰 황후에게 인심을 사는데 재물을 아끼지 않고 로비를 하는 등 치밀한 공작을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천운의 기회는 오고 드디어 자초왕자는 본국에 돌아와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일찍이 자초왕자에게 바친 자신의 애첩으로부터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는 실상 여부위의 씨앗이었다. 이 아이가 후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호(胡)를 조심하라'는 누군가의 점궤를 믿고 변방의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위업을 이루었으나 정작 그 호(胡)의 의미는 오랑캐 시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호해(胡亥)왕자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형가라는 불세출 검객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 곁에 있던 한 시녀의 기지로 구사일생한 진시황은 그녀를 후궁으로 삼아 태어난 아이가 호해였다. 헌데 진시황이 지방순시에서 돌아오다 객사하자 이 호해가 환관 조고의 모략에 빠져 황제에 올랐다가 결국엔 나라를 말아먹게 되니 그 점궤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암튼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나라이름을 진(秦)이라 하고는 고대 중국 시조인 3황5제의 두 글자를 모두 합쳐 '황제'라 했으니 이로써 '진나라에서 처음으로 황제가 시작한다'하여 진시황이라 불렀다. 자신을 천하제일의 위치로 격상하고 그 누구보다도 높다는 것을 뽐내고 싶었던 거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짐'이라하고 그 어느 누구도 못쓰게 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이를 본떴는지 '태양왕'도 모자라 '짐이 곧 국가다'라며 위세를 떨었다. 최근 북한에선 당 대회가 열려 자칭 대관식을 한 김정은도 자신의 직책을 새로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영원한 주석으로 하고 아버지를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고는 이 단어를 아무도 못쓰게 영구 결번으로 만들더니 자신은 당 위원장이라 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직책은 없다. 위원회 위원장이면 몰라도 그냥 당 위원장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희한한 이름의 완장을 찼다. 총서기나 서기장은 중국과 러시아의 것이니 만큼 주체를 내세운 그가 찾을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 게다. 더 꼴불견은 그의 연설이 끝나자 12번의 '만세'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만세 3창도 아니고 만세 12창이라니 아무리 신격화라 해도 좀 심하지 않나? 그러니 김정은은 이제 더 나아가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고 싶을까 궁금해진다. 누구처럼 '짐이 곧 공화국이다'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 또한 자존심 때문에 어쩌면 또 다른 단어를 만들어 낼는지도 모를 일. 갈수록 태산. 점입가경이다.


  • 흙수저들의 반란

    만년 꼴찌 후보로 소문났던 잉글랜드 프로축구팀의 기적적인 감동 스토리에 전 세계 축구팬이 흥분하고 있다. '흙수저'클럽 레스터 시티가 창단 132년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며 거짓말 같은 동화를 만들어낸 일이다. 인구 30 만여 명의 조그마한 소도시 레스터 시티 지역 연고팀으로 창단 이래 하위에서만 전전했던 팀이었다. 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1군에 기용되지 못해 퇴출된 선수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1경기당 불과 40 여 달러를 받고 뛰던 선수 등 주전멤버 11명 몸값이 유명 수퍼스타 한 명의 몸값에도 못 미쳤다. 게다가 지난 해 이탈리아 출신 라니에리 감독이 이 팀의 사령탑에 선임되자 '우승과 거리가 먼 감독'이라든가 '루저'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스포츠 도박사들은 우승 확률을 5000 대 1 로 보았다. 우승한다는 게 거의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헌데 그런 레스터 시티가 맨시티, 아스날, 맨유, 리버풀, 첼시 등 '빅5'나 토트넘 핫스퍼 같은 신흥 강호를 넘어 우승컵을 들어 올리자 '꼴찌 중 꼴찌의 반란'이라고 난리다. 이런 레스터 시티의 기적 같은 우승이 하도 믿기지 않다 보니 신비로운 이야기들까지 퍼졌다. 그 중 하나가 1485년 장미전쟁의 와중에서 전사한 리처드 3세 덕분이란 얘기다. 리처드 3세는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우리에겐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에서 형과 조카를 살해한 포악한 왕 또는 꼽추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485년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며 전사했다. 그 후 레스터 시 수도원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무덤의 행방을 530년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레스터 시의 한 주차장에서 유골이 우연히 발견됐는데 DNA 검사를 해보니 리처드 3세였다.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룬 후 레스터 성당에 묻고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추모시를 낭송했다. 그러자 이 때부터 우연인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레스터 시티가 7승1무1패의 성적으로 1부 리그에 올랐고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을 때까지 45전29승의 경이로운 성적을 거뒀다. 사람들은 구천을 헤매던 리처드 3세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준 레스터 시민들을 위해 우승컵을 안겨줬다고 이야기 한다. 이를 두고 LA타임즈가 "530년 만에 잠든 리처드 3세가 국왕의 기운을 전해줬다"고 하는 등 많은 언론과 유명인사의 극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레스터 시티 성공 신화에서 땀과 눈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공을 차고, 잠을 자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던 선수에게 감독이 슈팅훈련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였다니 눈물겨운 흙수저들의 반란 그리고 루저의 역전이 어찌 그냥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승리 후 라니에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축구에서건, 삶의 모든 영역에서건 스스로를 믿고, 시도해보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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