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당신이 꼭 필요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의 아이를 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죽은 남편이 가해자로 몰려 피해보상을 해주느라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엄마는 온종일 빌딩청소며 식당 일까지 해야 했고 집안일은 3학년인 큰 아이가 맡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냄비에 콩을 잔뜩 넣어놓고 집을 나서면서 메모를 남겼습니다.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서 저녁 반찬을 해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단다." 고된 삶에 지친 엄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그날 집에 돌아와서 순간적으로 삶을 포기할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 얼굴이라도 볼 생각에 둘러보는데 큰 아이의 머리맡에 쪽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쪽지에 적혀진 내용을 보고 난 엄마는 펑펑 울면서 잠시나마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 말대로 콩이 물러졌을 때 간장을 부었는데 동생이 짜서 못 먹겠다고 투정해서 너무 속상했어요. 내일은 저를 꼭 깨워서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 많이 피곤하지요? 엄마 고생하는 것 저희도 다 알아요. 힘내세요. 사랑해요." 한때 그 누구보다 험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던 미국의 여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 그 누구에게나 인생길에 좌절과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물어보면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각 사람을 천하보다도 귀하고 값어치 있다고 여기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서라도 가치 있는 삶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물론 자신과 이웃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시련을 극복한 아베베

    1960년 9월 10일 로마올림픽 마라톤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로마의 개선문을 통과하는 영광의 우승자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일 먼저 운동장에 들어선 사람을 보고는 어리둥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름이 아니라 검은 피부에 깡마른 체구 더구나 맨발로 마라톤에 임한 아베베 비킬라 (Abebe Bikila)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선수였기에 주최 측에서 두 번이나 이름을 정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6.25 참전용사요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병인 아베베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이 따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고 조국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에 대한 멋진 설욕이기도 했습니다. 아베베는 4년 후에 있었던 도쿄올림픽에서도 2시간 12분 11초라는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후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치는데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베베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장애인 올림픽 25Km 휠체어 눈썰매 부분에서 금메달을 따고 10Km 레이스에서는 특별상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시련을 시련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렇지만 시련을 발판 삼아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시련이라는 것이 때로는 죽을 만큼 어렵기도 하지만 죽는 것보다 극복하기가 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아베베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다리는 더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두 팔이 있다"그는 이와 같이 장애가 되어 있는 다리보다는 아직도 멀쩡한 두 팔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베베는 시련을 가져다주는 현재의 환경보다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의 미래를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환경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려는 꿈과 용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꿔질 수 있습니다.


  • 목사의 학위

    목사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직업의 하나로 볼 수 없는 직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아서 그분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도록 되어있는 성직(聖職)입니다.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되어서도 안될 일입니다. 세상에서 보듯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었다고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아닌 것 같은 사람이 훌륭한 목회자로 쓰임을 받는가 하면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회자의 자화상에 걸맞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목사의 학위를 꼽을 수 있는데 목사의 학위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학위가 목회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한지는 몰라도 학위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적지 않은 목사들이 엉터리 같은 학위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깊어지다 보면 가짜학위에 대한 유혹까지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에게 학위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문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든지 웬만한 학위쯤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노력을 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지 않으셔도 학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지만 그분이 부르지 않으면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사보다 못한 목사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봅니다. 세상이 박사를 더 알아준다 해서 스스로 목사보다 박사라는 호칭에 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목사로 부르실 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기에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박사학위가 목사보다 더 매력이 있다면 목사의 직분을 반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 갠트 여사의 순애보

    얼마 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던 한 사연이 지금도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고 조셉 갠트 일등상사의 미망인인 클라라 갠트 여사가 65년의 기다림을 끝으로 이 땅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95세를 일기로 양로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생사도 모른 채 살아야했던 이들은 죽음으로 해후를 했습니다. 결혼 2년 만에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을 만나게 되는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갠트 전 일등상사는 1942년 육군에 입대해서 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1946년 텍사스에서 LA로 오는 기차 안에서 갠트 여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들은 2년 뒤 결혼을 했지만 달콤한 신혼 생활은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깨졌습니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은 1950년 12월 군우리 전투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고 이듬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 "꼭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갠트 여사의 대답은 언제나 No 였는데 60여년 만에 돌아온 남편의 관을 보면서 '난 앞으로도 계속해서 갠트의 아내다. 천국에 갈 때까지 늘 그럴 것'이라고 얘기했다 합니다. 그녀는 이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곁을 떠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그는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군인이었다"고 회고하며 변하지 않는 사랑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남편과 아내가 식은 죽 먹듯 갈라서고 있는 가정들을 생각해볼 때 참으로 귀감이 되는 내용입니다. 갠트 여사를 보면서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조강지처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부부사이에 이루어야 할 사랑이란 이와 같이 죽음으로도 나눌 수 없는 완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성형수술'...'성령수술'

    어떤 사람이 성형수술을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사망을 했다는 끔찍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성형수술과 관계된 의료 사고는 그간에도 수없이 들어온 바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했다가 얼굴이 흉하게 부풀어 올랐던 풍선 아줌마'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연을 접할 때마다 그 당사자들은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불미스럽게도 우리 조국이 성형수술의 천국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손을 대는 관계로 자연 미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젊은 여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외모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개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눈, 코, 입술, 턱, 볼 부위 등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부터 은밀한 곳에 이르기까지 마음만 먹으면 못 고칠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외모도 한낱 눈속임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름다워지려는 욕구도 좋지만 굳이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한번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옛말 가운데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라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신체발부는 창조주에게 물려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각 사람을 창조하신 그분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각자에게 독특한 외모와 성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100억 가까운 사람들 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성형수술만은 피해야 합니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성형수술보다는 심령을 풍성하게 살찌우는 성령수술을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 자연과 도시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자연은 창조주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연을 찾아가면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반면에 도시는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꾸며지고 다듬어진 관계로 인간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높은 빌딩과 잘 다듬어진 도로 및 세련되게 단장된 분위기 할 것 없이 자연스러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문명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도시에서는 자연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도시 문명에서 하기 원하는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편리를 추구하면서 시작했던 도시의 삶에 대해 만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문명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삶에 대해서 피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공해가 없는 자연을 찾아 도시를 탈출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들어가면 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는 편리함은 없을지라도 복잡함이 없고 자유가 있으며 여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연에서는 도시에서 비롯되는 소음이 아니라 창조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바벨탑 사건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문명을 일으키며 살아보겠다는 것이 이 사건의 중심된 내용입니다. 이러한 바벨탑 사건은 역사 이래로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간들이 시도했던 문명을 통한 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만들어낸 도시문명이 결코 만족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따르듯 자연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창조주의 음성에 갈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찾고 있습니다.


  • 생각을 바꾸라

    나폴레옹의 전쟁 일화 가운데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끄는 군대가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뒷걸음질치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진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북 치는 소년에게 퇴각을 알리는 북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북을 둘러멘 소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군님은 제게 한번도 퇴각을 알리는 북 치는 법을 가르쳐주신 일이 없습니다. 저는 오직 돌격을 알리는 북만을 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소년의 대답은 나폴레옹에게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었고 패배 직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꼭 필요한 말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능력의 주님은 못할 것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갈 때 어떠한 삶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분의 원대한 계획을 바라볼 때 삶이 보다 확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좀먹는 부정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우리는 능력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도우시는 그분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이나 능력이 없을지라도 모든 일에 능하시고 지혜가 풍부하신 그분은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비록 당장은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분만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갈 때 삶이 온전할 수 있습니다. 이민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온전한 신앙을 통해서 긍정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이후로 생각의 틀을 한번 바꿔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못할 일이 없으시다고 말입니다.


  • 상대적인 행복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문화권에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비교를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항상 석차를 생각해야 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서열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등수에 들지 못하면 별로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반에서 일 이등을 하거나 전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야 공부를 잘 한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직장도 마찬가진데 남들에 비해 근무실적이 좋아야 인정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상대적인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하고서도 수석으로 입학하지 못했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좋은 승용차를 갖고 있지만 친구의 차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마음이 상해있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남과 비교를 하는 가운데 상대적인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이러한 식으로 결정된다면 이 땅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일 많이 가지고 얼굴이 가장 잘 생겼으며 공부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상대적인 불행보다는 상대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상대적인 행복이란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행복을 찾는 일입니다. 잘 사는 사람만 바라보면서 불행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바라보면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만 쳐다볼 때는 삶이 불만스럽지만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을 보면 감사와 만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처럼 믿는 행복이나 불행이 이처럼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기에 상대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랑의 양면성

    잘 아는 분이 언젠가 식당에 갔다가 경험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30대의 한 젊은 부인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는데 아이가 식당 안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던 모양입니다. 이를 보다 못한 연세가 지긋한 한 남자분이 아이의 엄마에게 주의를 줄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부인은 당신 일도 아닌데 참견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무안을 주더라고 합니다. 이분은 적반하장인 젊은 부인의 무례함을 참기가 힘들었다고 하면서 많이 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엄마는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을 다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무조건 감싸주고 떠받드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자유 하는 것 이상으로 이에 따르는 책임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용납과 관용도 필요하지만 악을 미워하고 응징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용서와 더불어 잘못에 대한 징계도 필요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봅니다.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잘못을 용납하는 것 이상으로 꾸지람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버릇없이 구는 손자를 보면서 나무랄 줄 아는 사랑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치면서 이에 따르는 자유와 책임의 양면을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인생을 죽도록 사랑하시되 그들에게 있는 죄는 그림자도 용납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죄인을 죽음에서 살리시는 사랑과 그들에게 있는 죄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양면적인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사랑으로 다가감과 동시에 천방지축인 자식에 대해서 매서운 회초리를 드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죄 중에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의가 있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 기러기 아빠의 인생

    예로부터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좀처럼 헤어지는 일이 없고 장소를 이동할 때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줄을 지어 다닙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 반대로 사용되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어린 자녀들을 유학 보내면서 가족까지 딸려 보내고 혼자된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외로운 것입니다. 자식을 위한다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한국 부모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이 때로는 엄청난 비극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가족 뒷바라지를 위해서 매년 미화로 $15만을 송금하고 있는 가장도 있는 모양입니다. 무리해서 송금을 하다 보니 본인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든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장기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가운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술이나 도박에 손을 대는 가장도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녀들과 함께 해외로 떠난 아내가 외도를 하면서 가정을 버리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내가 현지 남자와 살림을 차린 후 이혼할 것을 요구해오는 참담한 일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식을 해외로 유학시키려는 그 어떠한 명분도 이러한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러기 아빠는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될 대단히 잘못된 사회병리 현상으로서 자녀 교육 때문에 가정의 안녕과 화목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귀한 가정을 담보로 자녀들의 해외유학이라는 모험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와야 할 유학이라면 가족이 다 같이 오든지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단념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시한 결과 발생한 현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가정을 잘 지키고 돌볼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이야말로 그 어떠한 교육보다도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