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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하나는 잃었지만 세 개를 얻었다

     2016년 프랑스 최고 음악대학 '에꼴 노르말 드 뮤지끄' 회의실에서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만 18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학칙을 13세의 한 소년 때문에 바꾸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습니다. 48시간의 논의 끝에 13세 소년의 입학이 결정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주인공이 대한민국의 영재인 김두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한 손씩 연습을 마치고서야 양손으로 건반을 쳤습니다. 건반을 천으로 가려놓고 오직 손끝의 감각을 사용해서 건반을 익힌 후 천을 걷어 완벽한 선율을 그려내곤 했습니다. 사실 김두민은 태어나서 얼마 후 선천성 백내장이라는 판정을 받아서 시력을 잃어버리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생후 7개월부터 백내장 수술을 시작하여 무려 다섯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왼쪽 눈의 시력은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나는 노력과 함께 노력과 재능의 열정을 보였는데 그 배후에는 아들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지 않았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들의 신체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그를 양육했습니다. 이처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 부모님의 교육이 아들의 가장 약한 감각까지도 깨어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며 꿈은 말로만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이의 실현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됩니다. 김두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눈이 안 보이지만 청각이랑 촉각이 예민해요. 하나는 잃었지만 세 가지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스티븐 코비가 말했던 것처럼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가능성을 향해 열정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다음이란 없습니다

     한 남자가 과녁을 향해서 활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화살 두 개가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이러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발의 스승은 그에게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화살 하나는 버리거라!"


  • 자유의 여신상의 '얼굴'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의 이름은 '세계에 빛을 비추는 횃불을 든 자유의 신상'입니다. 이 여신상은 제작하는데 있어서 여러 상징성을 갖고 있는 만큼 유명세를 띄고 있습니다. 높이는 46미터지만 그 밑의 기단까지 포함하면 무려 93미터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신상의 발밑에는 노예해방을 뜻하는 부서진 족쇄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치켜든 오른손에는 횃불,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자국의 조각가인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에게 여신상의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시작할 때 그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누구를 모델 삼아 여신상의 얼굴을 조각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여배우, 유명 정치가, 엄청난 재벌 등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수많은 사람들이 추천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각가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생각하고 수호하는 자애로운 여신의 얼굴을 조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톨디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을 고심하던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은 바로 어머니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제작을 하는 과정에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오래도록 같은 포즈를 취하는데 힘들어하자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모델로 해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바르톨디는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처럼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어머니들은 세월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내면에 빚어지는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참답고 참다운 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르톨디가 여신상의 얼굴로 삼을 수 있었던 어머니처럼 우리 어머니들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분들입니다.


  • 작은 일에도 최선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박물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다른 직원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박물관의 바닥을 닦았습니다. 청년은 바닥을 닦으며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이러한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굳이 바닥 청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자 청년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곳은 그냥 바닥이 아니에요. 박물관이잖아요."


  • '돈키호테'를 낳은 삶

     명작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유명 작가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가 고향인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23세 때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여 부상으로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8세에는 터키 해적에게 납치를 당하여 알제리에서 5년 간 노예로 살기도 했습니다. 그후 네 번에 걸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해적에게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 장애: 꿈을 포기하는 것

     1968년 스웨덴 하보 마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Lena Maria는 선천성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양팔이 없었고 한쪽 다리마져 짧고 뒤틀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국제 장애인 수영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차지했고 발로 피아노 건반을 치면서 스톡홀름 왕립 음악학교에 입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부른 가스펠 송은 음반으로 제작되었는가 하면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레이나가 태어났을 당시 병원에서는 부모님에게 장애아동을 위한 전문 시설에 맡기는 것을 권했습니다. 중증장애인을 평생 돌봐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나의 부모는 그녀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그녀는 이제 장애를 겪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열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팔이 없어도 피아노를 칠 수 있고 그림을 그리며 요리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뒤틀려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운전을 하는가 하면 수영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만나면 불가능한 일이라 하면서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주어진 현실만을 바라보면서 도전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도전하고 노력을 계속한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계속 도전한다면 포기해 버린 그 일이 온전히 실현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시간 장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장애란 팔다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인생에 어떠한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레이나와 같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 버큰헤드호의 병사들

     대영제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852년 영국 해군의 수송선이었던 버큰헤드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배는 군인과 민간인 638명을 태우고 아프리카 남단을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케이프타운에서 65km 떨어진 바다를 지나던 배는 캄캄한 새벽 2시에 그만 암초와 충돌했습니다. 서서히 침몰하던 배는 차가운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배에는 고작 3척의 구명정이 있었는데 1척당 60명 전부 합해서 180명만이 구명정에 탈 수 있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영국군 74 보병연대의 지휘관 알렉산더 세튼 중령은 병사들을 갑판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도록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횃불을 밝히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구명정으로 옮겨 태웠습니다. 잠시 후 버큰헤드호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판자에 매달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병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중령님의 지시에 불평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병사들은 차가운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날 내 유익만을 우선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병사들이 먼저 섬겼던 여성과 어린이들이 아닐지라도 먼저 이웃을 생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헌신이란 이처럼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각박한 세상일수록 나만 살아보겠다는 이기적인 모습을 잠시 내려놓고 버큰헤드호의 병사들을 생각해보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관찰의 중요성

     미술에 재능을 가진 한 소년이 1년 동안 비둘기의 발만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그는 거리의 비둘기를 관찰하면서 엄청난 양의 비둘기 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왜 다양한 사물을 그리지 않고 비둘기의 발만 그리는 거니?" 그러자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비둘기 발만 계속 그리라고 하셨어요."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비둘기 발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소년은 어느덧 열다섯 살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열심히 비둘기 발만 그렸는데 놀랍게도 사람의 얼굴을 비롯해서 몸체의 세부적인 특징까지도 잡아내고 있었습니다.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그만큼 자신의 특별한 기법을 세워나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소년은 다름 아니라 훗날 입체파의 대가로 불려지고 있는 피카소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가 그에게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훈련을 시킨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서 자신들의 인생에 수많은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에 성공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성취하기 원하는 분야에서 많은 것 가운데 한 가지를 분명히 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어설프게 여러 가지를 알려고 애쓰기보다 제대로 한 가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한 분야를 파고든다는 것은 그 분야에 최고가 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분야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통해서 최고를 발견할 때 인생에 성공을 이룰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관찰이 전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라. 그리고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에서 배워라."


  • "나도 아이들과 함께 가겠소!"

     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뒤덮고 포악한 나치의 군대가 유럽을 유린하던 시절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 학교에 갑작스럽게 독일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어린 학생들과 교사들은 깜짝 놀랐는데 특히 학생들 가운데 가슴에 별 표시를 단 유대인 아이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은 유대인 학생들을 거칠게 끌어냈고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라는 선생님이 총을 든 독일군을 밀치며 달려와 울고 있는 학생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조선의 임금 숙종은 미복 차림으로 백성의 사는 형편을 살피기 위해 자주 미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허름한 작은 오두막집 앞을 지나는데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양반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면서도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볼 생각으로 오두막집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하면서 문틈으로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있었고 아이들은 짚을 고르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있었고 젊은 어머니는 해진 옷을 깁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가난한 백성들의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어찌나 가족들의 얼굴이 밝든지 도무지 근심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숙종은 주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도 빚도 갚아가며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궁금했던 숙종이 다시 묻자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공양하는 것이 곧 빚을 갚는 것이고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그 무엇도 부족함 없이 행복하고 만족할 때 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돈이 많고 물질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짜 부자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를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에 자족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람은 삶에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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