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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석의 동서남북

수필가, 목사

  • 눈물이 보약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항상 웃음이 가득하고 환하게 피어 있습니다. 웃음이란 그리스어로 Hele인데 건강 (Health)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웃음을 건강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웃음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노만 카슨스씨는 나이 50에 척수염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는 잠언의 말씀을 치유의 방법으로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웃으며 지내는 가운데 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도 웃음 못지않게 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눈물을 통해서 자신의 가장 정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을 보임으로써 죄에서 회개하고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연약함을 보일수록 그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하는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는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축복이 따른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찾을 진정한 웃음은 눈물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눈물은 삶을 회복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약입니다. 주님은 많은 때 눈물로 사역을 이루셨던 사실을 생각해 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우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보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는 특별히 눈물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애통함으로 자신을 무너뜨리는 눈물이 없이는 천국을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삶에 회복이나 치유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애통함으로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이 땅에서의 삶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마다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꿈을 가진 인생

    요사이는 웬만한 기업이나 관공서를 보더라도 Vision Statement라는 것이 있어서 '비전'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이처럼 내일에 대한 비젼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입니다. '비전'은 꿈을 전제로 하는데 꿈은 현재의 조건이나 상황을 뛰어 넘는 내일을 향한 의지이며 거룩한 용기입니다. '비전'은 이러한 꿈과 맞물려서 각오와 결단을 이룸으로서 온전히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꿈은 '비전'을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하며 꿈을 가진 사람만이 '비전'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보면 꿈에 대한 수식어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말 자체가 긍정적인 말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꿈 좀 깨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꿈자리가 사납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질시하고 경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을 인정해주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매도하려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꿈을 가진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을 때 내일의 삶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내일을 향한 꿈에 부풀어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 때문에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요사이 많은 청소년들이 꿈을 잃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언젠가 20대 나이의 한 가수가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접한 일이 있습니다. 그녀가 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인생을 이런 식으로 마감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통해서 내일의 삶을 펼쳐나갈 수 있으며 인생은 오늘의 삶에만 묶어둘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 고난의 비밀을 묻는 이에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13년간 병석에서 지내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23세에 폐결핵을 앓게 되었고 7년 후에는 척추병까지 얻어서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어머니는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야꼬야, 터널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별 수 없는 거다. 그러나 긴 터널도 끝이 있는 법이란다." 아야꼬는 어머니의 이 말씀에 큰 위로를 얻고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잠깐입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난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역경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도 징계를 받기 싫어하는 아들은 참 아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징계를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참 아들이 아니요 사생아라고 말합니다. 스승에게 징계를 받기 싫다고 경찰에 스승을 고발하는 학생도 있는 모양인데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 아들은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부모님이 한없이 고마워야 합니다. 참 아들은 고난 중에도 그 안에 숨겨진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 받고 회초리로 맞으면서도 그를 통한 진정한 사랑을 알기에 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허락하시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도 달게 견뎌야 하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주가 주시는 고난을 겪으면서 '그래도 내가 세상 가운데 버려진 사생아가 아니구나!'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분이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드셔도 늘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회초리 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무엇이 문제였나요?

    얼마전 하버드와 스탠포드에 동시 입학 허가를 받았다는 한인 학생에 대한 기사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버지니아주 토머스 제퍼슨 과학고교 학생인 주인공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엄청난 파문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 소개된 뒤 한국의 언론사들이 앞 다투어 보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학생의 부모가 사과를 하는 해프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당사자인 학생이 겪었을 고통 또한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음을 생각해봅니다. 학생이나 부모에게 책임의 소재를 따지기에 앞서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당사자인 학생이 나름대로 실력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 이처럼 무리수를 두어야 했을까요? 결국 그녀는 이 사건으로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좀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끌어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 일이 생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한번쯤 짚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느 부모에게 있어서나 자녀들이 공부도 잘 하고 삶에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우리 한인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명문학교니 일류학교니 하는 단어들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자녀들 역시 이러한 부모들의 가치관을 충족시키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해프닝도 다소 맹목적이라 할 수 있는 부모들의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게 되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일류나 명문학교는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이해의 미학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 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눈 밖에 나기는 한 순간이더라..." 이는 인생을 노래한 이채 시인의 시 구절로서 세상 모든 것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삶이 각자의 이해의 폭과 넓이와 깊이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영국 여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쟁으로 손과 발을 잃고 사람들에게 들려 나온 한 병사가 있었는데 여왕은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전에 한참동안 뒤로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병사는 여왕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국과 여왕폐하를 위해서라면 다시 한번 제 몸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병사를 감동시킨 것은 여왕이 수여한 훈장이 아니라 그녀의 눈물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했다가 사지를 잃고 돌아온 병사의 마음을 중심으로 위로하려 했던 여왕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는 병사가 당했던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며 이해하려는 마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마음은 사람 사이에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한다면 문제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자신이 그로 하여금 미워할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뒤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깨닫게 됨으로써 스스로 행동을 삼가면 남의 잘못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을 이해하려는 아량의 밭이 넓어질 때 사람 사이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도 끝까지 그의 입장에 서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진정한 교육의 힘

    한국의 성지고등학교 김한태 교장은 이 시대에 찾아보기 드문 교육자의 한 사람입니다. 한번은 전과 13범의 조폭 학생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주병을 꿰차고 학교에 오는가 하면 동생뻘 되는 학생들을 괴롭히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학생들의 불평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이를 보다 못한 선생님들은 회의를 열고 그를 퇴학시키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한태 교장은 그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문제의 학생을 교장실로 불러서 간곡하게 타일렀지만 그는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교장은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책임을 맡겨서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특별히 개교기념일에는 그 학생에게 표창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상의 내용은 "이 학생은 앞으로 선행을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상을 주어 표창함"이었습니다. 아들이 상을 받아 오자 학생의 부모들은 감격한 나머지 목이 메였습니다. 그후 조폭 출신 학생은 서서히 변해갔는데 자격증을 세 개나 따고 전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교육의 힘을 새삼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일화입니다. 만일 그 학생을 교칙에 따라서 엄하게 다스림과 동시에 학교에서 쫓아냈더라면 그의 장래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어쩌면 전과 14범, 15범을 넘어서 사회에 발붙일 수도 없는 영원한 전과자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김한태 선생님의 헌신적인 교육에 힘입어서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엉터리 같은 인생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때 살려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교육의 힘은 끝까지 참고 인내함으로 기다려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스승의 기다림을 통해서 바른 길을 찾게 되고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으로 인해서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 감사를 깨닫는 삶

    하나님은 많은 때 맹목적인 사랑보다는 회초리를 통한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잘못 되었을 때 진노하는 사랑은 잘 되었을 때 칭찬해주는 사랑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그 안에 은혜가 있고 이러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감사는 이처럼 주어진 감사를 얼마나 깨닫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깨달을 줄 아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감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멕시코로 관광을 갔다가 겪게 된 일입니다. 찾아간 곳은 한 샘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고 곁에 있는 다른 샘에서는 찬물이 나오는 냉 온천 지대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네 아낙네들은 아주 편리하게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더운물로 빨래한 후 바로 뒤돌아서서 찬물에 빨래를 헹굴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전도를 할 목적으로 빨래하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편리한 샘들도 다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불평하듯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왕이면 이 샘물에서 비눗물까지 나오게 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혹시 우리도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삶 가운데 무디어져 가고 있는 감사를 회복해야 하는데 감사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거리를 가지고도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감사거리를 가지고 있어도 원망이나 불평불만을 일삼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 있어도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선물입니다.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작은 일부터 넉넉히 감사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

    한 아버지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다가 그만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차를 세우고 운전면허증을 내밀며 그 밑에 만 원짜리 몇 장을 감추어 건네줬습니다. 돈을 본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버지를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이 신기해서 아버지를 바라보니 아버지는 "얘야 괜찮다, 다들 그렇게 한단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 아이가 방학을 맞이하여 과일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보니까 주인은 보이는 곳에만 싱싱한 과일을 올려놓고 오래된 과일은 뒤에 감춰 두었다가 살짝 끼워서 파는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다들 이렇게 해서 과일을 판단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회사에서 횡령 사건을 저지르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달려온 아버지가 아이에게 다그칩니다. "아이고 이놈아!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 너는 왜 가르치지도 않은 짓을 하니?" 그러자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들 그렇게 하는 걸요. 저는 그냥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뿐이에요."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르고 양심적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어른들의 모습은 온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순간적인 말이나 행위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준다면 그들에게 악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서 무심코 하는 행동이 그들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거울에 비추어주듯이 정직함으로 행할 때 그들이 이를 본받고 이러한 가치관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지난 25년을 정들여 살았던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한동안 적지 않은 감회에 젖어야 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이후로 한 장소에서 사반세기를 지내며 겪었던 이런저런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목회를 시작하기 전 세상에서 사업을 할 때 장만했던 집인데 같은 장소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이곳에서 초·중·고교를 다 다녔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는 더없이 귀한 보금자리요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사를 하는 일이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통계도 있듯이 이번에 이사하는 것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살던 집을 팔고 새 장소에서 집을 사는 일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시간을 맞춰서 에스크로를 마감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을 사고파는 절차와 과정이 녹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간 살아오면서 모은 가구며 세간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다가 버려야 했던 사실은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얻게 된 커다란 교훈입니다. 평소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타운에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금번 이사는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 타운은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편리함과 불편함이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아파트나 콘도가 많이 있는 관계로 답답하고 복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동차 주차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도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개인적으로 편리한 점도 있는데 우선 일터와 가까이 있다 보니 예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주말이나 저녁에 시간을 활용해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마디로 예전보다 훨씬 다이나믹해진 삶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 물과 같이 삽시다

    물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식물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생수라고 표현하셨으며 이 땅에 오셔서 물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주님을 닮아서 물과 같이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첫째, 물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찾아갑니다. 물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조건 없이 바치며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 부어줍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대가를 초월하여 자신을 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온 인류를 사랑하심으로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물 한방을 피 한 방울 남김없이 쏟아 부어주셨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물은 우리에게 헌신적인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을 찾아 임하기를 좋아하는데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고집을 부리는 일이 없습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낮아지기 위해서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찾아갑니다. 주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을 보여주셨던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셋째, 물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은 담기는 그릇의 크기에 관계없이 잘 적응하는데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거기에 맞춰서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담기는 그릇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서 자신을 부단히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주님도 이처럼 자신의 스타일이나 방법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과도 편벽됨이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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